이른 아침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시청역을 향해 지하철에 몸을 맡겼다. 홀몸으로 지하철에 앉아 책을 읽는 게 얼마만인지 모른다. 누구를 만나지 않더라도 일부러 지하철을 타서 독서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시청역 앞에서 오랜만에 만난 대학원 동기가 말했다.
"언니는 적응력이 참 좋은 것 같아"
"서울 살 때는 서울에서 잘 살더니, 인천 가서는 서울에 코빼기 안 비치고 말이야"
적응력이 좋다는 말에 나도 인정했다. 대학원 시절 선배들과 교수님에게 이쁨을 받은 데에는 '까라면 까'는 그들의 환경에 잘 적응한 탓도 있었다. 취업을 앞두고 이런 나의 면모는 더 두드러졌다. 울산에 인턴자리가 나왔을 때 지역적인 거리감 때문에 지원자가 없을까봐 교수님은 걱정을 하고 계셨다. 나는 망설일 필요도 없이 가고 싶다고 손을 들었다. 나에게 지역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배운 것을 써먹을 수 있고 어느 정도 규모의 회사라면 갈 의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나의 동기는 철저하게 따지는 편이었다. 지방은 절대 안 된다. 공장을 끼고 있는 연구소도 원하지 않았다. 교수님이 몇 번의 취업제의를 했지만 본인이 가고 싶은 취지와 다르면 딱 부러지게 거절을 했었다. 선배들은 그런 동기를 못마땅해 하기도 했었다.
나는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마음으로 빠르게 취업을 했다. 울산에서 한 달 인턴 생활을 마치고 인천에 터를 잡은 것이다. 남초집단인 제조회사 연구소에서 최선을 다해 일했다. 홍일점으로 있으면서도 남자들 못지않게 야근을 했고,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회식자리 외 타부서와의 친목 자리에서도 나는 두드러지게 활동을 했다. 그 덕분에 같은 회사에 다니는 남편과 결혼을 한 것이다. 적응력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동기는 취업을 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결국에는 본인이 가고 싶어 하는 방향으로 직업을 정해서 지금까지 서울에서 일을 하고 있다.
대학원 시절, 새벽 2시까지 이어지는 실험을 마치고 자취방에서 동기와 함께 자는 날이면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언니는 나는 죽을 때까지 일할 팔자 같아". 동기는 일을 하지 않는 자기의 삶은 상상할 수 없다고 누누이 말해왔다. 자신이 계획한대로 그는 19개월 쌍둥이를 키우고 있지만 일을 하고 있다. 어린이집과 시어머니의 도움으로 자신의 일을 놓지 않고 지내는 동기를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적응력이 좋은 나도 막상 워킹맘이 되면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나에게는 아이를 맡길 곳이 없다. 돈을 지불해서 사람을 붙이고 일을 하고 싶을 만큼 일에 대한 열의가 있지도 않다. 결국 나의 의지는 이미 익숙해진 지금 삶에 안주하려 하고 있다. 적응력이 좋은 것이 문제인 걸까?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라는 말이 미덕인 줄 알았다. 가리는 것 없이 주어진 것들을 받아들이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건 삶의 주권을 타인에 넘겨주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내 미래에 대한 인생 지도가 없었다. 어떤 회사에서 일하고 싶은지. 어떤 지역에서 내 인생을 살아갈지. 어떤 성격의 배우자를 만날지. 배우자와 어떤 육아 방식으로 아이를 키울지. 나는 어떤 것도 계획하지 않았다. 운명이라는 종이배에 나를 싣고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다.
남편은 나와 결혼한 이유가 어른들에게 잘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사랑해서 한 것도 있겠지만, 그는 배우자를 결정하는 중요한 한 가지가 있었던 사람이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이 사람과 내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이 얼마를 가진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돈이야 같이 벌면 된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아파트 라인에 살면서 회사에서 만난 이 남자가 운명의 대상이라 한치 의심도 없이 결혼한 것이다.
딸아, 엄마 닮지 마라. 엄마의 밝은 성격을 닮는 것은 대찬성이다. 하지만 길고 긴 인생을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운명에 맡겨 온 나의 전철을 밟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뽑기 왕이라고 불려도 좋을 만큼 운명에 맡긴 지난 과거의 삶은 누구에게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주체적으로 살아온 것과 운에 맡겨 흘러온 것에 대한 차이는 분명히 있다. 딸아, 구렁텅이에 빠지더라도 너의 선택에 의해 삶을 결정지었으면 좋겠다. 나를 닮았다면 어디서든 잘 적응하며 살 것이다. 부디 바라건대 네가 설계한 삶의 지도를 가지고 그 길을 걸어 나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