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를 응시하며 차오르는 눈물을 머금고 손뼉을 치며 웃는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거실, 수북이 쌓인 빨래를 개다 말고 박수를 치다 문뜩 '나 뭐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 <닥터 차정숙>을 보다 눈물의 박장대소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차정숙은 의사 면허가 있지만 20년 동안 전업주부로 살면서 의사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 안에 쓰러진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의사'로서 나서 보고 싶었지만 의사면허는 장롱면허에 불과했다.
구글 이미지 참조
무용지물인 의사면허 소지자 차정숙과 환자를 살린 건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외과 전문의였다.
차정숙에게 이번 일은 의사가 얼마나 귀한 직업인지 몸소 알 수 있는 사건이었다. 정숙은 간암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은 후 다시 레지던트부터 의사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드라마는 드라마로 보면 되는데 주책맞은 아줌마는 빨래를 개다 마치 차정숙이 된 것처럼 휩쓸려 버렸다.
차정숙처럼 남편보다 내가 공부는 더 잘했는데..
차정숙처럼 의사 면허는 아니지만 나도 박사학위 수료까지 했는데..
차정숙처럼 나도 일을 포기하고 전업주부로 살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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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나도 마음만 먹는다면 나의 일을 할 수 있을까?
전공을 선택하면서 특정한 목표 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교수님의 권유가 있었고 학과 과목 중 가장 흥미를 느꼈기에 종이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연구소로 취업한 후의 일상은 달랐다. 순수한 학문이 아니라 성과를 내야 하는 전투현장이었다. 기존 제품보다 뛰어난 물성을 가진 신제품을 만드는 것은 매일이 스트레스였다. 결국 나는 일에서 도망쳤다.
종이를 공부해서 취업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사용지를 만드는 일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내가 몸 담았던 특수지라는 새로운 분야도 있고 기록물 보존을 위한 일 등 다양한 영역이 있다.
육아만 전담하고 있었던 나에게 작년부터 전공을 이용해 아이들을 대상으로 수업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 재생 종이 만드는 일을 통해 아이들에게 환경 보호를 알리는 수업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 다시 한번 수업을 준비하면서 많은 부분을 업그레이드시켰다.
<재생 종이 만들기로 지구 지키기 A부터 Z까지>
종이는 나무로 만든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는 나무 사용을 줄여야 한다. 하지만 사용해야 하는 종이의 양이 줄지 않는다면 원재료는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멍게, 코끼리 똥 같은 것을 이용해도 종이는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손쉽게 원재료를 얻을 수 있는 것은 폐지를 활용하는 것이다. 천연 펄프가 아닌 재생 펄프를 이용한다면 숲에 나무가 사라지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작년 수업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실험은 아이들과 버려지는 종이를 이용해서 재생 종이를 만드는 것이었다. 마치 요리를 하는 것처럼 버리는 종이를 찢어 물에 푼 뒤 종이 죽을 만든다. 뭉클거리는 촉감이 슬라임을 하는 것처럼 아이들에게 기분 좋은 느낌으로 다가간 것 같다.
삶은 국수의 물을 빼듯 채반에 곱게 갈아낸 종이죽을 부어 탈수과정을 거친다. 얇게 펼쳐진 촉촉한 부침개처럼 종이의 형태가 드러난다. 가재수건을 이용해 물기를 적당히 없애고 다리미로 남은 수분까지 없애버리면 금세 재생종이가 만들어진다.
재생 종이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왜 스케치북은 양면을 써야 하는지, 왜 휴지는 필요한 만큼만 써야 하는지, 우유팩은 왜 따로 분류해서 모아야 하는지 등을 배운다. 작은 우리의 실천이 지구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재생 종이 만들기로 배우는 것이다.
차정숙이 장롱면허였던 의사면허를 꺼낸 것처럼 나 또한 잊혀가던 전공지식을 다시 마주하고 있다. 회사의 이윤추구를 위해 머리를 싸맸던 지식에서 새싹 같은 아이들에게 지구 환경을 지키기 위한 종이제작 방법을 알려줄 때 뿌듯함이 더 느껴진다. 그동안 공부한 것이 헛되지 않고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유익한 일이라니.
드라마 <닥터 차정숙>은 불륜, 시집살이 등 다양한 내용들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20년 동안 충실히 전업주부로 충실히 살아왔던 여성의 재도약이라는 점이 돋보인다. 최근 읽었던 김미경의 <마흔 수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사람은 자신의 미래를 기대하지 않으면 절대 현재를 열심히 살 수 없다는 것을.
드라마 속 차정숙은 나의 내일을 기대하게 해 주었다. 10년 20년 후에도 경력 단절 환갑의 전업 주부가 아닌 일을 할 수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차정숙에게 의사면허가 있다면 나에게는 종이를 공부했던 이력이 있다. 구겨진 종이가 아니라 빳빳한 새 종이처럼 쫙 펼쳐진 앞 날을 기대하며 다가오는 내일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