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무기력함에 한계가 찾아오는 걸까. 이렇게 나태해도 될까 싶을 만큼 오전 시간을 물 쓰듯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수도꼭지가 달려있다면 손에 힘을 꼭 쥐고 잠가버리고 싶다.
쌓여있는 빨래와 설거지를 후딱 해치울 마음은 고이 접어두고 푹신한 침대와 소파에 몸을 누이는 평화로운 오전의 따스함에 머리를 기대 본다. 할 일은 많은데 손이 가지 않는 것은 정신이 지배하는 무기력함이 몸을 장악한 탓이다. 일어나기 싫음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일찍 아이들의 아침을 챙기고 학교를 보냈으니 이제는 나를 돌봐도 되는 시간이 아닐까. 나를 돌보는 시간에 책이라도 한 자 읽고 생산적인 활동으로 이어나가고 싶지만 아이들을 들여보내고 현관문에 발을 들이는 순간 몸을 지탱하던 에너지가 기척도 없이 달아나 버렸다.
나에게 주어진 4시간을 잘 활용해야 할 텐데,, 머리는 성장을 향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몸은 이미 안락의 맛을 봐버린 상태다. 머릿속으로 분주히 바쁘게 움직이던 오전을 보내고 오후가 되면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남편이 오기 10분 전, 경각심에 빨간불이 켜지고 행동에는 거침이 없어진다. 이제는 해야만 하는 집안일은 오전동안 받아둔 햇살을 동력으로 내 몸을 움직이게 한다.
오후가 시작됐다.
뽀로로를 친구 삼아 커 온 아이들에게 뒤늦게 그림책을 펼쳐주며 붙들고 있으려니 쉽지 않다. 어렵기 때문에 가치 있는 엄마표는 엄마의 시간과 에너지가 얼마나 소비하는가. 진작했다면 자발적으로 책을 읽고 즐길 나이일 텐데. 그럼에도 이제라도 그림책을 알고 접한 것에 감사하고 아이들이 티브이를 보다가도 "책 읽어줄게"라는 말에 내 무릎 위로 와주는 것이 고맙다.
근묵자흑이라는 말처럼 주변에 그림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득해서 육아 6년 만에 집에 있던 그림책들이 보물처럼 다가왔다.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육아를 하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배고픈 애벌레>를 자리 차지한다며 버리려고도 했었다. 그림책의 사이즈는 일반서적과 다르게 아이들의 흥미와 그림책의 표현 방식에 따라서 책의 사이즈가 달라진다. 책꽂이를 삐져나오고 들쑥날쑥한 것들을 남편과 나는 애물단지로 여겼다. 거기다 아이까지 없는 신혼이다 보니 시누에게 미리 받은 고전 그림책들이 보물이 아니라 고물로 밖에 보이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최근 마을 주민들과 <그림책론>을 읽으면서 그림책에 대해 깊이 이해해 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집에 있는 시공사, 피카소 동화나라에서 나온 책들이 얼마나 귀한 책들인지 모른다. 좋은 것은 나만 알 수 없어서 아이들에게도 꼭 읽어주는 시간을 가지는데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내가 읽어준 그림책의 내용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2017년에 출판된 <코끼리왕 바바>를 읽어줬더니 2022년 출판된 <네가 분수가 된 것처럼 펑펑 울어버린다면>을 읽어줄 때 그림책 속에서 '엄마 이거 코끼리왕 바바 아니야?'라고 되물었다. 더불어 '엄마, 그림책에서는 울어도 된다고 말하는데 왜 어른들은 울지 말라고 하는 거야?'라고 물었다. 아이들은 그냥 듣는 것처럼 보여도 그림을 기억하고 내용을 마음에 담는다.
최근에는 엄마들의 성장유치원 킨더줄리에서 우리 아이 매일 독서(영어 그림책) 프로젝트 '우아매독'을 맡아서 하고 있다. 영어 그림책을 읽고 간단히 인증만 하면 되지만 일상에 치이다 보면 그림책 한 권 읽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있다. 뜻이 맞는 엄마들과 함께 영어 그림책을 공유하고 읽은 것을 공유하다 보면 손이 가지 않던 영어 그림책에 '아! 이거!'하면서 손이 간다.
그림책을 공부하고 있어서 그런지 유명한 작가들의 원서를 발견이라도 하는 날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최근 아이가 빌려왔던 <Frog and Toad Together>은 집에 비치된 책 읽기가 좋아 시리즈 중 하나였고 <그림책론> 스터디 시간에 거론됐던 책이라 더없이 반가웠다. 두꺼운 책이지만 단어가 쉬웠고 내용이 재밌어서 원서를 재밌게 읽게 되었고 번역서는 어떤 내용일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비소설 책을 읽을 때는 아이에게 배경지식을 알려주는 재미가 있다. 동물들에 대한 과학 도서나 화석, 빙하 등 자연 관찰 도서는 아이가 쉽게 읽지 않으려고 하는데 옆에 끼고 읽어주면서 설명해 주고 그림을 보며 나 또한 새로운 지식이 쌓이는 것이 느껴진다. 아이가 공부하는 시간인지 내가 공부하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다.
하루에 할 수 있는 것들이 정해져 있는데 예전에는 나를 위한 것들로 2년을 채웠다면 요새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오후 시간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육아만 해도 될까?라는 생각도 든다. 주변에 일하는 엄마들을 보거나 성장하는 엄마들을 보면 나는 한없이 초라해진다. 한 번에 두 가지를 못해서 아이를 돌보면서는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원망스럽다.
하지만 영어 그림책을 읽어주는 것이 결국 나의 영어에도 도움 되리라고 믿는다. 단순히 숙제를 봐주고 있지만 어찌 보면 나는 가르치는 교수법을 아이들을 통해 배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양한 그림책을 읽어주는 것도 상황에 필요한 것들을 알려주기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 본다.
먼 훗날 나는 그런 것들을 기대한다. 돈벌이는 안되지만 나눔이 있고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은데 지금 아이들을 가르쳤던 경험으로 배움의 기회가 없는 아이들에게 조금은 더 나은 선생님이 되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다고. 내 아이를 잘 가르치고 키우면 다른 아이들에게 무언가 알려줄 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육아만 하고 있지만 작은 사회에서 더 큰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발버둥이라고 생각하면 오늘도 아이들과의 오후 시간에 총력을 다할 것을 다짐해 본다. 육아만 하는 지금의 나의 시간은 절대 헛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