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개도리 Dec 14. 2023

10대의 소녀, 나에게 보내는 안녕 #1

-안녕, 나는 40대 너야! 만나서 반가워 10대를 잘 이겨내서 고마워-

북한과 대한민국은 마치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처럼 서로 다른 세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3개월 만에 대한민국으로 온 저에게 두 곳의 현실 차이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10대, 20대를 북한에서 보냈고 30대를 대한민국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저의 고향은 참으로 추운 곳입니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기에 참 따뜻한 곳입니다. 

저는 저의 고향을 정말 사랑합니다. 저에게 너무 아픈 추억이 있는 곳임에도 저는 고향을 매우 사랑합니다.

백두산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겨울에는 영하 30도를 오르내리고 5~6월까지 깊은 산골짜기에 눈과 얼음이 쌓여 있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의 고향도 시간이 흘러 지구온난화의 영향을 받아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습니다. 


저는 5살쯤부터 한글을 읽었고, 신문도 좔좔 읽었습니다. 모르는 글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더하기 덜기도 참 잘했습니다. 그 시절 부모님의 칭찬을 받으면 우쭐해지던 제가 대견합니다.

지금은 사교육이 발전하여 5살이면 우리글과 산수를 잘하는 아이들이 많지만, 제가 어릴 때에는 사교육이라는 단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네 어른들은 저를 보고 똑똑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저는 두 살 터울 오빠가 있습니다. 오빠는 저 때문에 어머니에게 매번 혼났습니다. "동생도 아는데 너는 왜 모르냐?" 오빠는 어떤 때는 저에게 가만히 숙제를 물어보곤 했습니다. 저는 어떤 때는 오빠한테 알려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어머니에게 오빠가 알려달란다고 고자질도 하곤 했습니다. 추억은 참 아련하고 슬프게 다가옵니다. 


제가 있을 때까지(2011년) 북한은 11년제 의무교육제를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유치원 1년, 인민학교(남한의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북한은 제가 다닐 때는 '인민학교'로 4년제였지만 지금은 명칭이 '소학교'로 5년 제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저는 인민학교 입학할 때 입학생들을 대표하여 연단에서 축하문을 읽는 후보로 뽑혔습니다. 저와 남학생이 한 명이 뽑혀 글을 연습을 해보게 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사람들 앞에 나서서 발표나 자기소개를 잘 못합니다. 아니, 발표나 자기소개를 싫어하는 MBTI 가 전형적인 'I'입니다. 어렸을 때는 더욱 그랬습니다. 숫기가 없어서, 하라고 하면 더 잘 못하였습니다. 그런 제가 많은 학생들,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전교생들 모인 앞에 나가서 글을 읽으라고 하니까 답은 나왔지요? 저는 잘 읽지 못했고, 선생님께 못 읽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남학생이 혼자 축하문을 읽었습니다. 


지금도 10대를 돌아보며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1학년에는 학급반장을 선출하고 조별로 학습조를 묶습니다. 대부분 학급반장은 남학생이하고 저는 조장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열성분자였습니다. 2학년에 올라가면  "영광스러운 조선소년단"에 입단합니다. 조선소년단 입단은 2월 16일, 4월 15일, 6월 6일 3번에 나뉘어합니다. 제일 먼저 공부도 잘하고 모법인 학생들을 선출하여 1차로 입단시킵니다. 저는 물론 학급에서 1차로 입단하였습니다. 입단할 때는 입단선서, 규약, 혁명활동에 관한 것은 물론 영웅들의 시들도 외워야 합니다. 지금도 북한에서 외웠던 서정시 '나의 조국',  '어머니', '리수복영웅의 수기' 등 많은 구절들이 저의 머리에 파편처럼 남아 있어 불쑥불쑥 튀어나옵니다. 


리수복 영웅의 수기는 6.25 전쟁시기 적의 화구를 가슴으로 막고 승리에 기여한 자폭용사 이야기입니다.


나는 해방된 조선청년이다
생명도 귀중하다, 찬란한 내일의 희망도 귀중하다. 
그러나 나의 생명 나의 희망 그것은 조국의 운명보다 귀중치 않다. 
하나밖에 없는 조국을 위하여 둘도 없는 목숨이지만
나의 청춘을 바치는 것처럼 그렇게 고귀한 생명 위대한 희망이 또 어디 있으랴 


저는 어린 마음에 리수복영웅의 수기를 구구절절 가슴에 새기며 어느 순간에 조국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우겠다는 영웅의 꿈을 키우며 성장하였습니다. 


북한의 소년단 경례, 넥타이, 소년단 휘장, 간부표식


"사회주의 건설의 믿음직한 후비대가 되기 위하여 항상 준비하자!"


저희 때에는 위의 구호를 웨치며 '항상 준비'라는 손을 머리 위로 올리는 소년단 경례를 하였습니다. 조선소년단에 입단하면 붉은 넥타이를 매고 소년단 휘장을 달고 다닙니다. 지금 말로 하면 '교복의 완성은 넥타이와 휘장'이었습니다. 이렇게 2학년에 올라가 소년단에 입단을 하게 되면 간부선거를 합니다. 소년단은 한 학급이 한 분단으로 한 학교가 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어느 날 분단위원장 선거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어릴 때는 공부 잘하는 것이 무엇보다 제일 중요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저희 학급에는 여자 중에 저를 포함 3명이 서로 경쟁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 명은 보위원 딸, 한 명은 주재원(보안원) 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냥 평범한 노동자의 딸이었습니다. 소년단원들이 모여서 누구를 분단위원장으로 추천하냐고 공개로 물어볼 때!! 저는 분명 "내가 할 수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학생들 중에 제 이름이 많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보위원의 딸이 분단위원장을 하게 되었고 저는 그보다 낮은 사상부위원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린 마음에 울면서 집으로 가려고 할 때 담임선생님께서 저에게 어머니께 가져다 드리라고 편지를 주셨습니다. 


저는 집으로 가면서 정말 그 편지를 펼쳐보고 싶었지만, 끝내 어머니께 그냥 가져다 드렸습니다.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분단위원장 못하면 말지, 그게 뭐 울일 일냐"며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씀이 저희 집이 생활이 넉넉지 못하다 보니 보위원의 딸을 분단위원장 시켰다는 것입니다. 분단위원장을 하려면 분단에서 쓰는 문건(노트)도 많이 준비해야 되고 학급에서 필요한 일들을 척척 해결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세계에는 공부만 잘하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어른들 세계는 물질과 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분단위원장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4학년에 올라가서야 보위지도원 딸이 단위원장을 하게 되어 비로소 분단위원장 표식을 달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어린 시절의 소녀인 저를 보면 참 기특하기도 하지만 너무 불쌍하기도 합니다. 저의 어린 시절은 어른들이 걱정해 준 말이 큰 상처가 되어 마음속에 피눈물을 흘리며 살았습니다. 제가 어릴 때 어머니는 항상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딸은 부모 잘못 만나 고생만 하는구, 너무 불쌍하다"


하루는 보위부지도원 딸의 엄마가 저와 단둘이 만났을 때 저에게 말했습니다. 

"아이고 똑똑한 애 부모잘못 만나서... 부모 잘 만났더라면 좋았을 거" 

저는 그때 정말 제가 부모잘못 만나 불쌍한 아이라고 생각하며 늘 슬펐습니다. 어른들이 저를 동정한다고, 걱정한다고 해준 말이 저에게 비수가 되어 슬픈 10대를 보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도 그런 마음을 부모님께 표현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혼자서 눈물 흘리곤 했습니다. 


그 시절에 우리 어머니도 엄마가 처음이어서 자신의 딸이 너무 소중하고, 미안하고, 금과 옥 같은 딸이기에 '불쌍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 10대의 어린 소녀, 저는 정말 불쌍한 아이가 되었고, 부모를 잘 못 만났다는 현실 속에서 슬픈 삶을 견디며 살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는 저의 아이들을 불쌍하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가능하면 하지 않을 것이며, 만약에 불쌍하다고 생각이 되어도 절대 제 입으로 아이들에게 불쌍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엄마가 되리라 다짐하며 매 순간 도전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 저는 저의 부모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 시절 저는 훌륭한 부모님을 만났기에 지금의 저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태어난대도 엄마의 딸로 태어나고 싶고, 기회가 된다면 엄마께 저의 모든 걸 다 드리고 싶습니다. 


참으로 어릴 때 외운 것은 아직도 머리에 남아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그럼에도 북한이 저의 고향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에 와서 10년을 조금 넘어 살고 있지만, 아직도 때 없이 흥얼대는 북한노래에 저자신도 깜짝깜짝 놀랩니다. 쇠뇌가 무섭다는 말이 저를 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30년 가까이 형성된 저의 정체성은 어쩔 수 없는 가봅니다. 


저는 그 시절 10대의 소녀, 저에게 슬픔 속에서도 잘 커줘서 고맙다고 위로의 응원과 안녕의 인사를 보냅니다. 10대의 힘겨운 나날들을 경험하며 견디었기에 오늘날의 건강한 삶을 살 수 제가 있는 것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두만강을 건너, 시작된 모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