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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개도리 Dec 21. 2023

10대의 소녀, 나에게 보내는 안녕 #2

- 사랑하는 어머니 존경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

1997년 대한민국과 북한!!!

대한민국에 IMF가 터졌다면, 북한에는 북한 당국이 소위 말하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습니다. 

1994년부터 정치적인 긴장, 국제적인 압력이 고조되면서 언제부터인지 모를 '고난의 행군'은 소리 없이, 예고 없이 제가 살던 고향에 들이닥쳤습니다. 엎친데 겹친 격이라고 몇 년째 이어지는 자연재해와 경제고립으로 북한은 식량난에 허덕이었고 '기아'라는 악마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고향을 사랑합니다.


제가 살던 동네는 참으로 이쁜 동네였습니다. 봄이면 앞산 뒷산에 살구꽃, 진달래꽃이 피어나 봄을 알렸습니다. 노래에 있듯이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저의 고향은 새봄이 찾아옵니다. 제비들은 집집 처마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알을 낳고 새끼를 키웁니다. 


저는 어린 시절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좋아했습니다. 특히 제비가 자기를 돌봐준 흥부에게 보물박 씨를 가져다주는 이야기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입니다. 저는 자신의 집 제비가 언젠가는 보물 박 씨를 물어다 주리라는 꿈을 꾸고 있었답니다. 


저의 동네 사람들의 말은 투박해도 따뜻하고 정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13살 되던 해 1996년!!

저의 고향에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인생에 첫 번째 내리막 길이 펼쳐졌습니다. 그것도 완전 수직 내리막길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은 일하면 국가에서 쌀을 배급 주던 사회였는데, 배급을 주는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마저 아예 주지 않았습니다.  특히 나라에서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하던 착한 사람들부터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집도 1995년부터 슬슬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기 시작하였고, 1996년부터 매끼 죽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온 동네가 굶주림에 허덕이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은 1990년대 들어서면서 소련의 붕괴와 세계 경제봉쇄,

연이은 자연재해로 순간에 암흑의 시기가 한 번에 들이닥쳤습니다. 많은 북한주민들이 기아에 죽어갔습니다. 제가 사는 세상, 온 동네가 다 무덤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다는 것과 경험했다는 것은 대단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굶주림이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지, 사람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그 시간들을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듭니다. 


우리 학급에는 자신은 크면 나라를 지키는 영웅이 되겠다고 멋진 꿈을 꾸던 한남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남학생도 기아를 이기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친구의 이름이 생생히 떠오릅니다. 이 기회에 꽃망울을 피우기 전에 저 멀리로 떠난 친구들의 이름이라도 불러 잠시나마 추모의 시간을 가집니다. 



부디 천국에서 영생하기를!! 그곳에서는 굶주림 없이 밝고 행복하게 지내기를!!!


참으로 통곡해도 풀리지 않을 응어리들이 가슴에 스며들었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영웅이 되는 꿈을 꾸던 그 학생은 그 꿈의 꽃망울을 피우기도 전에 나라에서 굶겨 죽였습니다. 그렇게 꿈 많고 똑똑하던 저의 친구들이 기아에 쓰러져갔습니다.


당시 북한에서 다행히 부모님들이 장사에 빠르게 눈이 튼 분들이나, 생활력이 강한 분들이면 그나마 삶을 연장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불법으로 국경을 넘었습니다. 그 길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과 아직도 가족의 생사조차 모르고 타국에서 헤매고 있는 북한주민들이 셀 수 없습니다.


저는 새벽에 우는 까마귀를 정말 싫어합니다. 그때 고난의 행군 시기 새벽에 까마귀가 울기만 하면 이튿날 꼭 사람이 죽었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살던 동네에서 사람들이 이틀이 멀다 하게 죽어나갔습니다.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이상해져 갔습니다.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사흘 굶으면 선비도 도둑질한다"는 말이 있듯이 도둑이 성행해졌습니다. 


어느 날은 뒷집 000 아버지가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어느 날은 옆동네 000 엄마가 남편을 죽이고 기차에 치워 죽었다고 위장했지만 장례를 하루 앞두고 진실이 밝혀져 법의 심판을 받았고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 평소에 이웃들과 잘 지내고 웃음 많던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왜 살인까지 했는지 저는 어린 나이에 정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은 뒷집 000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습니다.

이유는 아들이 자기를 죽이려 하기에 자기가 먼저 아들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동네가 이상해졌습니다. 저는 지금 생각해도 끔찍해지고 소름이 돋습니다. 동네가 왜 그렇게 변했고, 어떻게 그 시절을 견딜 수 있었을까? 먹을 것이 없어 소나무 껍질(일명 송기라고 불렀음)을 벗겨먹었고,  못 먹어 본 풀이 없이 별의별 풀을 다 먹어봤습니다. 


굶주림이란 참으로 구차하고 부끄러운 것이고, 염치가 없는 것입니다. 굶주림이란 참으로 사람을 나약하게 만들고 인간을 쓰레기로 만듭니다. 굶주림이란 참으로 힘듦이고 슬픔이고 아픔입니다. 그럼에도 그곳은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었습니다. 저는 그곳, 제가 나서자란 고향산천을 정말 사랑합니다. 따뜻한 온기와 인간미가 있었기에 저는 그곳에서 그 나날들을 살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사형을 몇 번 경험하였습니다. 국가는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법을 어긴 사람을 시범으로 사람들을 모아놓고 형을 집행하였습니다. 학교에서도 수업을 미루면서까지 총살을 가서 볼 것을 지시했습니다. 그냥 굶어서 죽고, 나라에서 법을 어겼다고 죽이고... 그럼에도 고향을, 조국을 사랑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꽃피는 들길만 찾아서 우리 간다면
더 좋은 내일의 행복은 그 언제 안아오랴
머나먼 길에 시련 많아도 한마음 변함없이 
아~내한생 이 땅을 사랑하리
- 북한 노래 中 -


저는 음치입니다. 하지만, 노래를 너무 좋아하고 사랑했습니다. 힘든 날들에 노래를 부르며 이겨냈습니다. 위에 노래처럼 어려운 환경에서도 고향땅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며 성장하였습니다. 지금도 '고난의 행군' 그 시간의 흔적들은 저에게 너무나 큰 상처와 아픔입니다. 이렇게 글을 쓰기까지 20여 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제 머릿속에서 '고난의 행군'에 대한 기억을 영영 지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저의 아픔은 조금은 무뎌져 갔고 피하는 것만이 답이 아닌 직면해야 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어머니께 전하지 못한 마음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저는 자신이 그 험악한 굶주림 속에서 잘 성장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제가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은 것은 우리 어머니의 강인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은 2017년이 끝나갈 때 다시는 제 인생에 오지 않을 제일 밑바닥을 찍고 서서히 올리 막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도 우리 집은 2017년 말 어머니라는 강한 기둥이 있었기에 고난의 행군을 2년의 긴 여정으로 온갖 고난을 이겨내며 끝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몇 년이 흘러도, 북한에는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남아있습니다. 


저의 어릴 때 꿈은 박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왜 박사가 되려고 했을까요?

동네 어른들이 "너는 커서 뭐가 되겠니?"라고 물어보면 저는 "박사가 되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곤 하였습니다. 어린 마음에 박사가 제일 똑똑하고 멋있어 보였던 모양이에요. 


그러나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저의 꿈은 저 멀리 달아나 버렸습니다. 저는 고난의 행군시기 매일, 매 순간 울면서 살았습니다. 아마, 평생 흘려야 될 눈물을 그때 다 흘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는 '고난의 행군'시기처럼 살지 않으리라 굳은 결심 하며 '생활전선'에 나섰습니다. 14살부터 공부는 저 멀리 뒷전으로 하고 돈벌이를 위한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나무를 해다 팔 기 시작했고, 국수장사를 했고, 음식장사를 했고, 청진뜀뛰기 장사, 디젤유장사, 함흥 장사, 평성 장사  돈을 벌기 위해 별의별 장사를 했습니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께서 저를 크게 혼내셨습니다. 

"돈만 밝히면 나중에 커서 부모도 모르고, 동무도, 조국도 배반한다. 정신 차려라!!"

저는 선생님의 말씀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돈을 벌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큰 깨달음을 주신 담임선생님께 감사하며 항상 "돈"이 전부가 아니다. "사람"이 먼저다. 돈을 벌어도 정직하게 벌자고 결심했습니다. 돈을 버는 결과 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당시 저의 좌우명은 <상대방에게 손해를 주지 말고, 나도 손해보지 말자>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겉만 볼 때는 "장사꾼"같지만 지내보면 사람이 "진국"이다는 말을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이 듣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저는 중국영화를 봤습니다. 영화에서 나오는 사람이 금덩이 두 개를 들고 하나는 더러운 금덩이고, 하나는 깨끗한 금덩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금덩이는 금덩이다. 그것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금덩이라는 결과가 중요하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합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제가 돈을 더 벌지 못하는 이유는 과정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생에 정답이 없듯이 돈을 버는데도 정답은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이 그 길을 정해야 합니다. 저는 "돈"보다는 "인간관계"를 중요시했습니다. 아마 그래서 더 많은 부를 이루지 못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람이 성장하는 데 있어 가정교육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엄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특히 어머니로부터 밥상머리 예절, 윗사람과의 예절, 옷차림 등 여자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매 순간마다 걸음걸음 들으며 자랐습니다. 또한 우리 어머니는 돈에 대한 가치관이 확고하였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지만 사람 마음은 잃으면 다시 얻기 힘들기에 "돈보다 사람이 먼저다" "항상 사람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는 이야기를 늘 들으며 자랐습니다. 어머니의 훌륭한 가정교육이 있었기에 저는 항상 무엇이든 선을 정해놓고 절제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가끔은 어머니가 저에게 돈이 제일 중요하다고 가르쳐 주셨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가르치셨으면 저는 잘못된 세계관으로 바르게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삶의 매 순간 저는 어머니에게 감사합니다. 어머니의 한평생 헌신과 따뜻한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의 제가 있는 것입니다. 한 번도 어머니에게 표현하지 못한 마음 대한민국에 와서야 비로소 전해봅니다. 그리고 살아서 꼭 만나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우리 다시 만날 수 있겠지요?? 어머니라는 그리움의 크기는 저의 마음에 바다가 되어 끝없이 파도칩니다. 지금도 한달음에 고향으로 달려가 그리운 품에 얼굴 묻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존경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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