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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개도리 Dec 07. 2023

두만강을 건너, 시작된 모험

- 20대의 끝자락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대한민국으로 왔습니다.

2012년 1월 어느 날, 


정신 차리고 보니 제가 대한민국에 와있었습니다. 

북한에서 대한민국으로 오는 저의 여정은 거의 3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과정은 참으로 슬픔과 아픔의 시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영영 만날 수 없다는 생각, 

고향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지는 날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탈북과정에 잡히면 북송되는 상황에는 목숨을 던질 생각에 고조의 긴장감이 조성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잘 때는 악몽에서 헤맸고, 깨서 이동 중에는 몽롱한 환각 속인 듯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그냥 움직였습니다. 제가 아닌 타인 같은 저였습니다.


저는 30년을 북한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한국나이 30이 되던 해, 10월의 마지막쯤에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북한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에서 나오는 글귀를 떠올렸고,

압록강의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제가 두만강을 넘는 이 길은 북한의 표현을 빌면 저는 나라를 배반한 '반역자'입니다. 

하지만, 저는 내가 태어나 나서자란 곳, 선조의 무덤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30년의 나의 시간들이 있는 이곳에 과연 돌아올 날 언제 일가 생각하며 압록강의 노래를 속으로 불렀습니다.


일천구백십구 년 삼월일일은 이내몸이 압록강을 건넌 날일세
년년이 이 몸은 돌아 오리니 내 목적을 이루고서야 돌아가리라
압록강의 푸른 물아 조국산천아 고향땅에 돌아갈 날 과연 언제 일가
죽어도 잊지 못할 소원이 있어 내 나라를 찾고서야 돌아가리라


지금도 조용히 불러보면 고향을 떠나던 날이 생각나 눈물이 흐릅니다.

저는 탈북하는 날까지 직장에 출근하여 출근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국경경비대 정치지도원의 집에 하루 머물렀습니다.


다음날 정치지도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두만강에서 제일 얕은 곳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강을 건넜습니다. 그날 정치지도원의 말이 아직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 가서 잘살아, 그리고 공민증은 강에 버릴 거야. 만약에 잡혀도 나를 불지 말라"

참으로 서운하고 슬픈 말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3년쯤 중국에 머물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헤어지는 고향의 사람이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 말에 뭐라 할 시간도 없이 저는 일행과 함께 어둠에 싸인 두만강에 몸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몇 분 후 중국 땅에 도착했습니다.

"멍멍"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둠에 덤불 속을 헤치며 길 아닌 길을 공포 속에 걸어 저를 기다리고 있는 자동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중국 쪽에 브로커 두 명이 마중 나왔었습니다.


저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북한에서 공민증(주민등록증)은 대한민국처럼 사용빈도가 높지 않습니다.

굳이 공민증 번호를 외울 필요도 없습니다. 가끔씩 선거에 참여한다던가, 여행을 위해 증명서를 발급할 때 사용합니다. 하지만, 공민증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누가 나를 죽여도 나를 찾을 사람이 없을 것이고, 나는 아무도 모르게 사라질 것이다.'


그렇습니다!!


저는 공민증을 버리고 두만강을 건넌 순가부터 불법체류자가 되었습니다. 

공포에 공포가 저를 잡아먹고 있었습니다. 


화룡에서 연길로, 연길에서 미지의 땅 대한민국으로!!

저는 중국에 머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다행히 운이 좋아 대한민국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2011년 12월 1일 연길 어느 아파트에서 각양각색의 탈북민 8명이 대한민국으로, 대한민국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2011년 3월 점쟁이가 한 말을 떠올렸습니다. 대한민국으로 오기 전 1년쯤 저는 많은 점쟁이들을 찾아다녔고, 방토와 굿까지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제가 하는 일들이 계속 꼬이기만 하고 하나도 풀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점쟁이가 저에게 12월에 여행을 떠난다고 하였고, 우리 부모님들에게 자식이 한 명뿐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집은 남매였는데 말입니다. 3월 점쟁이가 말할 때 저는 정말 여행 떠날 일이 없었기에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집을 떠날 당시 저의 오빠는 군복무 중이었습니다. 제가 떠나서 3개월 후 오빠가 제대되어 집으로 왔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 부모님에게는 두 명의 자녀이지만 한 명뿐이라는 말에 공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 점쟁이는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011년 12월 1일 사랑하는 가족과 영영 이별하며 목숨을 건 모험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두만강을 건너 목숨을 건 3개월 모험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2012년 1월 드디어 대한민국이라는 미지의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북한에서 대한민국으로의 모험은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은 특별한 순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북한은 대한민국보다 거의 3~40년 뒤떨어져 있다고들 말합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문을 열었을 때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듯한 놀라움과 설렘, 두려움이 함께 다가왔습니다. 


20대 끝자락에서, 태어나 세 번째 아홉수를 넘어, 3개월의 타임머신을 타고, 사랑하는 가족과 영영 이별이라는 큰 아픔과 맞바꾼 새로운 자유는 저에게 행운 같은, 행운 아닌, 행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당당히 대한민국의 여정은 저에게 커다란 행운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낯선 풍경, 다채로운 사람들, 그리고 현대적인 도시의 모습은 저에게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선사했습니다. 북한에서의 폐쇄적인 작은 우물에서 벗어나 또 다른 진정한 자유를 맛보는 것은 제 인생의 최고의 행운이었습니다. 


이 기회를 빌어 또 한 번 큰 소리로 고백합니다. 

저는 행운아입니다. 

저는 사람복을 타고났습니다. 

저는 고향을 떠난 그 정신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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