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회사에서 중요하게 협상할 거리가 있었어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비록 온라인 미팅이었지만 오랜만에 화장을 하고 자켓을 꺼내 입고 책 한 권을 들고 출근길을 나섰다. 오늘의 책은 바로 20년 연속 와튼 스쿨 최고 인기 강의였던 스튜어트 다이아몬드 저자의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어떻게 얻는가?>이다.
운전을 하면서 생각해보았다. 내가 협상을, 설득을 제일 잘했던 경험이 언제였나? 불현듯 대학교 때 수업시간에 했던 발표가 떠올랐다. 디자인학과 학생이었던 나는 내가 정말 하늘처럼 존경했던 디자이너이자 지도교수셨던 김 교수님의 주장을 꺾고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사용하셨던 교재를 근거로 나의 주장을 뒷받침하여 나름 설득력 있게 논리를 펼치는 날이었다. 이렇게 거창하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내 기억에 그만큼 두렵고 나름 담대한 발표였던 것이다. 교수님은 과제하는 내내 내게 주제를 바꾸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정한 주제로 답을 찾고 싶었고, 그걸로 준비하고 있었던 것을 모르셨기에 다소 놀라셨을 수도 있다. 긴장되고 떨리는 마음으로 발표를 했고 그 끝에 교수님께서 일리 있는 주장이라고 말씀해주셨다. 몇 주간 답을 찾기 위해 씨름한 나의 노력을 인정해주신 것이다. 좋은 발표라고 말씀해주셨던 것이 기억에 남아서 아직까지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하고 있었나 보다. 또 졸업작품 전시회에서 겸임 교수님이었던 강 교수님께서 "너는 뭘 해도 잘할 거다" 그 말 한마디가 아직까지 마음속에 남아있다. 너는 뭘 해도 될 거라는 그 믿음과 인정 하나로 사람이 삶을 지속할 수 있다는 걸 깨달으며 아침부터 흐뭇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회사를 출근하자마자 1시간 안에 이 책을 속독하고 협상 준비를 하겠다고 말했다. 경험과 노련함이 부족한 내가 사회 경험이 나보다 족히 10년은 더 앞선 연륜 있는 어른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준비를 해야 했다. 대체로 책에서 하는 말은 그거였다. 협상 테이블에 앉은 상대방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사람은 결국 모두 감성적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불쾌하게 해서는 절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 협상을 통해 얻고자 하는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절대 목표를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모든 말과 행동은 목표를 얻어내기 위한 과정에 필요한 수단이며 조금씩 거리를 좁혀 내가 원하는 곳으로 상대방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대방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사람의 필요가 무엇인지 적어 내려가며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준비했다. 2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준비해야 했기에 집중력을 발휘해 현재 상황에 대해 분석했다. 책에서 나온 대로 질문을 통해 모르고 있던 필요한 정보들을 수집했고, 결국 손해를 보지 않고 협상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집으로 가는 퇴근길 교수님께 연락을 드렸다.
교수님 잘 지내시죠? 오늘 출근하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연락드려봤어요!
12학번 누구입니다.
그래 잘 지내지? 난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즐겁게 잘 지내
진짜요? 교직에 안 계세요?
아 너 모르는구나.. 작년 8월에 나왔지
교수님은 7년간의 교직 생활을 접고 스튜디오를 열어 다시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계신다고 한다. 물론 전문 분야이긴 하지만 그 나이에 다시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또 내게 큰 영감을 주셨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나이는 중요하지 않구나.
우와 멋있어요. 놀러 가도 되나요?
곧 미국 가서 봄에나 보자
네, 꽃 들고 갈래요. 꼭 초대해주세요!
호랑이 선생님이었던 김 교수님 때문에 나는 대학생 때 많이 울었다. 뭘 크게 혼이 나서 운 게 아니라, 과제를 낼 때마다 교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하면 그게 너무 서러웠다. 교수님이 잘했다고 인정을 해줘야만 만족이 되는 결과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퇴근길에 교수님을 떠올려보니, 내가 교수님께 디자인을 배운 게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배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끝까지 집요하게 무언가를 해내는 방법에 대해 배웠구나. 그리곤 스튜디오 방문할 때 들고 갈 화병을 골랐다.
1센티도 안될 것 같은 허연 빡빡머리에 안경을 올려 쓰고 과제를 컨펌해주기 전에 손을 풀던 습관, 완벽주의에 사무실 조도까지 맞춰 작업하셨던 교수님의 방 냄새와 분위기, 벽에 걸린 현대 디자인 거장들의 친필 사인 포스터까지. 나주 배를 좋아하셔서 졸업 후 언젠가 명절에 꼭 선물해드리리라 마음먹었던 나의 다짐까지 입이 씰룩거리며 옛날 생각을 했다. 이런 내 마음을 알면 교수님은 많이 부담스러워하시겠지만, 그래도 나의 마음을 담아 여기에 남겨본다. 덕분에 하루의 시작부터 저녁까지 행복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교수님의 작은 인정에 울고 웃던 내가 이젠 교수님께 농담도 하니, 참 세월이 느껴진다. 교수님이 기억하던 그때보다 내가 한 뼘 더 성장한 것 같아서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