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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현 철학관 Jan 09. 2023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3개월 만에 다시 상담을 받으러 갔다

1월 2일 새해 첫 출근부터 가슴이 막혀왔다. 올해 우리 팀은 전년도 매출 대비 2배 이상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기에 첫 주 회의부터 갑갑했다. 아직 손에 잡히는 것 하나 없으니 책상 앞에 앉아있는데 가슴이 답답해서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그리고 바로 전화를 걸어 전에 다녔던 정신의학의원에 예약을 잡았다. 상담을 받던지 약을 먹던지 해야지, 올해는 혼자서는 쉽지 않겠다 싶었다.


나는 상담을 두 번 정도 길게 받은 적이 있다. 한 번은 아빠가 돌아가시고 주변에 안 좋은 일들이 한꺼번에 생기면서 우울증이 심하게 왔었고, 또 한 번은 회사로 다시 들어가면서 엄마와 같이 일하면서 엄마와 관계 때문에 주로 상담을 받았다. 동일하게 두 번 다 약 처방을 받았다. 이렇게 말하긴 그렇지만, 나는 약 먹는 거 좋아한다. 약은 효과가 좋다. 거부감이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알지만, 항우울제는 진짜 효과가 좋다. 그래서 나는 쓸데없는(절대 쓸데없지 않지만, 감정적으로 힘든) 상담보다 약 처방받는걸 더 좋아한다. 오늘도 상담 중에 신체적으로 가슴이 답답함을 느낀다고 하니, 또다시 소량의 항우울제 약 처방을 해주었다.


"모두에게 각자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 오늘 선생님이 이 워딩을 쓰셨다. 아, 이 사람 기독교인이구나? 갑자기 상담받으러 가기가 극도로 싫어졌다.


2022년 12월 19일, 나는 드디어 길고 긴 신앙생활을 그만두기로 했다. 간략하게 이야기하자면, 2016년 어느 선교사이자 목사가 내 지인을 성추행했고, 나는 2017년 뒤늦게 알게 되어 1년 동안 교회 안에서 이 문제를 공론화시키고 해결해 보고자 전교인을 상대로 싸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를 갉아먹는 미련한 짓이었지만, 그땐 참 순수하고 뜨겁고 정의로웠다. 기사를 내고 별 짓을 다 해봤지만 담임목사도 교인들도 다 우리 편이 아니었고 그렇게 신천지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교회에서 쫓겨나다시피 제 발로 나왔다. 그 이후로 나는 내 인생에 기독교의 흔적을 하나씩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다녔던 교회는 그런 일반 한국교회 부적응자들이 모여 만든 작은 독립 집단으로 2년 정도 다니다가 안 가다가 어떤 계기로 다시 2021년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내 나에게 신앙이나 믿음이 없다는 아니, 그냥 지금 이런 내 상태도 나는 참 마음에 들어서 교회를 다닐 필요가 없게 되었다. 교회를 관두고 그다음 주였던 25일 크리스마스에 종교와 상관없이 휴일로 온전히 쉴 수 있다는 게 나는 참 기뻤고, 비로소 성장과 해방감을 느꼈다.


그런데 십자가라니. 왠지 의사 선생님도 단어를 내뱉고 아차 싶긴 했던 것 같다. 자세한 상담 내용은 밝힐 수 없지만, 나는 이 일이 내가 감내해야 하는 삶의 무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고 그는 그걸 십자가라고 표현했다. 같은 표현일 수 있지만 그냥 왠지 모르게 거북하고 불편한 걸 보니 아직도 내 안에 들여다봐야 할 감정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안에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 걸 알았다. 그리고 참 내 인생도 대단하단 생각을 했다. 이렇게 이벤트가 많기도 쉽지 않은데 지루할 틈이 없는 내 인생이 레전드구나 싶었다.


어찌 되었건 빨리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써 내려가야겠다.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 이 뭉치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날이 23년에 꼭 오기를 바라본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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