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의 약점에 공감하는 한마디
“선생님, 이건 정말 선생님한테만 털어놓는 거예요.”
스피치 수업 제자인 H가 어느 날 갑자기 내게 찾아와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와 커피 한 잔을 하고 싶다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한 걸음에 달려간 약속 자리.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하고 기업에 입사한 터라 바쁠 만도 한데, 특별히 시간을 내어 나를 만나러 오겠다는 이 친구가 너무 반가웠다. 그런데 만나자마자 밝게 인사하며 웃던 그녀의 안색이 변하는 건 정말로 순식간이었다. 안부를 묻자마자 이내 눈가가 촉촉해지는 그녀를 보면서 순간적으로 그녀에게 무언가 일이 있구나란 것을 직감했다.
“괜찮아, 뭐든지 편하게 말해봐.”
“내가 같이 고민해 줄게!”
너무도 완벽해 보이는 그녀에게 도대체 어떤 고민과 어려움 있었던 걸까. 이왕이면 내가 깊숙이 공감할 수 있는 조언해줄 수 있는 일이기를 바라며 조심스레 사연을 물어보았다.
“사실 아닌 척하고는 있었는데, 막상 사회생활에 돌입하니까 너무 힘드네요.”
“ 특히 저더러 자꾸 보고서 작성을 잘 못한다며 자주 퇴짜를 놓는 팀장님도 너무 무섭고...”
수업 때마다 남들 앞에서 발표를 매우 잘했던, 똑 부러지게 뭐든지 잘할 것만 같았던 그녀도 회사생활에서는 어려움이 있다는 걸 그제야 파악했다. 그동안 자존심 때문에 좀처럼 자신의 부족함을 쉽게 털어놓지 못해 혼자서 자주 괴로웠다고 한다.
한편으로 H에게 고마웠던 건, 이렇듯 용기를 내어 나에게 어려움을 이야기해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편한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며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렇게 한참 동안 그녀의 속사정을 들으면서 동시에 문득, 내가 기자로 활동하던 사회초년생 시절이 떠올랐다. 뭐든지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나의 생각과는 달리, 기자 업무는 그리 녹록지가 않았다. 기사를 작성하고 보도자료를 쓰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 하루는 PC 키보드와 종일 사투를 벌이다 답답한 마음에 선배 기자에게 어려움을 토로했다.
“아이고, 고운 씨는 기사 작성만 제대로 잘하면 완벽할 텐데…”
“뭐, 어쩌겠어. 이쪽 말고 얼른 방송 진행 업무로 이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사실 본래부터 방송기자가 꿈이 아니었던 터라 기사 작성 훈련이 되어있지 않았던 건 사실이지만, 선배의 말이 내심 불쾌함으로 다가왔다. 나의 약점에 대해 위로를 주기는커녕 민감한 구석을 후벼 파는 조언을 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마음이 아파진 나는 그의 말에 더 할 말이 없어졌다.
‘이 분은 처음부터 기사를 완벽하게 잘 썼을까?’
‘그렇게 실력이 있었더라면 지금쯤 메이저 언론사에 계셨어야 하지 않나?’
상처 받은 내 머릿속에는 선배에 대한 미움이 쌓일 뿐이었다. 내가 어렵게 말을 꺼내며 바랐던 건 그저 한마디 위로였는데 말이다.
“괜찮아, 경력 많은 선생님도 마찬가지야. 아직도 작문이나 서류 작성은 어려울 때가 많단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스스로 직접 겪어 본 어려움 덕분에 제자 H에게 공감의 위로를 전할 수가 있었다. 한때 별다르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꾸준한 훈련과 노력 끝에 성장한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제자의 눈물도 서서히 멈추었다. 물론 해결책이나 방법을 제시하는 조언을 늘어놓을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공감이 우선 필요한 것임을 알았기에...
‘공감이란 나와 너 사이에 일어나는 교류이지만, 계몽은 없고 나만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일방적인 언어다. 나는 모든 걸 알고 있고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들이다. 그래서 계몽과 훈계의 본질은 폭력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이자 작가 정혜신은 저서 <당신이 옳다>에서 일방적인 조언에 대해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전한다. 고통받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내 체중을 실어 공감하는 것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저 손쉽게 손가락으로 지시만 하고 있을 때가 많다는 것. 그럴 때마다 상대방은 결코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지닌 약점이나 부족함 때문에 힘들고 심적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실질적인 조언이 아님을 우리 모두가 알아두면 좋겠다. 위로가 우선임을 알고서 상대방의 아픈 부분을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것도.
“나도 마찬가지야.”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의 성장을 돕는 말. 상대방이 스스로의 아픈 구석을 털어놓을 때에는 나도 마찬가지로 아픈 구석을 드러내며 한껏 공감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