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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주 Mar 09. 2024

[일상] 영어동화책 읽다가

자괴감이 든다. 

반 강제로 엄마는 아이가 책을 읽도록 격려해야 한다. 학교 교과과정 책임자(curriculum head)가 친절하게도 전체 공지를 주셨다. 적어도 하루 20분은 읽기, 15분은 수학을 풀도록 집에서 지도해 주세요. 이 선생님은 평소에도 엄격하고 무서운 편인데 이 학교에서 어쩌면 가장 필요했던 부분을 맡는 분이기도 하다. 자율성 내에서도 엄격한 규칙과 질서가 있어야 아이들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4년째 좋아하는 Mo Willems 책들


아이가 두 살 반 되던 그 시기 부랴부랴 영어책을 사서 읽어주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너무도 명확하다. 학교를 들어가려면 인터뷰를 해야 했고 아이가 말을 알아들었으면 하는 마음에 책을 읽어주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4년이 넘어갔다. 이 하루 일과는 나에게 가장 큰 수확을 안겨주었다. 영어와 한국어에 대한 이해 폭이 말도못하게 좋아졌다. 한국말도 못 하고 영어는 더더욱 못하는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두 언어는 원래 다른 것이며 치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당연한 생각을 깨닫고 스스로 매우 대견해했다. 왜 여태껏 멍청하게 공부한 걸까?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다 보면 이런 일이 생긴다. "엄마 이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한글 동화책을 읽어주다 보면 모르는 단어 혹은 은유적 표현이 자주 나온다. 동화책이니 의성어 의태어는 영어책, 한글책 모두 가득하다. 설명을 해 주다 보면 머리가 꽉 막히고 말을 더듬거린다. 일단 대강 설명하다 보면 더 큰일이다. 그 설명을 알아듣지 못하면 그 설명을 이해시키기 위해 또 다른 새로운 단어를 쓰는 나를 보게 되니깐 말이다. 아이는 그렇지 않더라. 


"이게 무슨 뜻이야?" 내가 아이에게 물어보면 매우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어떤 사전보다도 더 명확하하다. 문맥에 맞는 상황과 모습 느낌을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사전에서 설명한 뜻은 아니더라도 책을 이해하는 데는 아이 설명이 정확했기에 속으로 감탄하지만 겉으로 티는 안 냈다. 너무 우쭐해지면 좀 곤란하니깐 말이다.  난 한국학교를 나왔고 넌 영어학교를 나왔으니 당연한 거라고 얘기하니 바로 수긍하는 눈치긴 하다. 


두 개의 다른 언어 사이에 나는 학창 시절부터 많은 곤란을 겪었고 이는 지금까지 내 생활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다. 나는 영어를 쓰는 나라 UAE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모든 사람이 영어를 쓰고 웃고 떠들고 공감하고 배우기 때문이다. 여기서 살아남는 것이 목표이자 즐거움이기도 하다. 언어는 기술이고 강력한 도구인데 연장이 너무 안 좋으면 실력 발휘는 어림도 없다. 이것이 내 영어 체득의 동기가 되기도 하고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어떤 열망이기도 하다.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연스레 듣게 된 팟캐스트를 통해 다시 한번 느꼈다. 사람들하고 사이좋게 잘 지내야 나도 즐겁고 내 머리도 즐겁고 내 아이도 즐겁다는 사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을 잘 듣고 잘 대답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여기서는 노력해야 하는 일이다. 어떤 면에서 이런 환경에 놓인 내가 너무 감사하기도 하다. 어릴 적에 해외 나가서 살면 왠지 신날것 같았는데 그 꿈이 이루어졌으니 말이다. 


오랜만에 다시 영어모임에 문의 메일을 넣었다. 한동안 느슨해진 생활을 타이트하게 만들어 나가는 중이다. 적당한 긴장감과 적당한 압박이 생활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상황에 맞춰 너무 빠르지 않게 너무 급하지 않게 즐겨야겠다. 갈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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