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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까야 Jun 18. 2024

예능 작가의 트라우마

어느샌가 사람들이 티브이를 보지 않는다. 친구들은 내가 하는 예능을 아무도 모른다. 시청자 연령대는 점점 높아져만 간다. 자연스레 구인이 줄어들고 있다. 정규 프로그램이 아닌 단발성 실험용 프로그램이 많아진다. 가까스로 티브이 프로그램에 자리를 구해도 단발성 프로그램일 확률이 높다. 단발성 프로그램을 할 때는 기존 급여의 70퍼센트만 받는다. 어렵게 구한 프로그램에서 6년 전 급여를 받는다. 그리고 6개월 뒤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며 새로운 프로그램을 구해야 된다.


불안했다. 취직이 안 될 때는 이력서만 20통 넘게 보냈다. 그 중 면접 연락이 오는 건 1~2 곳 정도였다. 내가 걸어왔던 길이 잘못된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예능 작가로 만들었던 실수들과 게으름에 대한 벌을 받는 것 같았다. 차라리 깨지 않는 잠을 자다가, 면접 문자가 오면 그때 일어나 밖으로 나오고 싶었다.


재미있는 예능을 만들고 싶다는 꿈만 가지고, 이 불안감을 버티기엔 너무 벅찼다. 타고 있는 배가 점점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예능 작가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수많은 지표들이 설명해주고 있었다. 배에 내리기로 결심했다. 다른 배를 찾기로 결심한 뒤, 여러 가지를 시도를  해보았고, 가장 재미있는 것이 '모임'이었다. 사람들과 교류하며 돈을 있다는 것이 정말 즐거웠다. 일주일 동안 준비한 모임으로 5만 원만 벌어도 감격스럽고 즐거웠다. 모임으로 꾸준한 수익을 만들고 싶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지난달 내가 주로 이용하던 플랫폼에서 매출이 대략 120만 원이 나왔다. 이제 내 모임도 점점 성장하는구나, 이 기회를 발판 삼아 더 나은 모임을 만들어 보자 하며 의욕이 솟구쳤다. 하지만 바로 다음 달, 즉 이번 달에는 모임을 찾는 사람이 급격하게 줄었다. 참가자가 오지 않아 모임 3개가 연달아 폐강하였고, 수익은 0원이 수렴했다. 내 모임에 문제가 있다면, 그 점을 찾아서 수정하면 된다. 하지만 도저히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모임 자체가 문제라면 잘 되는 모임이 있을 수 있고, 잘 안 되는 모임이 있을 수 있는데, 모든 모임이 다 모객이 되지 않는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모임장들의 모임들도 다 모객이 된다는 걸 알아차렸다. 한 전문가의 분석 글에서는 모임을 보는 참가자의 기준이 높아지고, 다른 SNS를 통한 외부 모임(오픈 카톡방, 인스타그램 등)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가라앉는 배에서 나와 옮겨 탔던 배가 또 가라앉는 게 아닌 가 생각했다. 방송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런 일을 겪었다면,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내 일만 잘하면 될 거라 주문을 걸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이미 수요가 줄어들고 있는 시장에서 크게 아파본 경험이 있다. 이 경험은 좌절감과 공포감을 알려줬다. 개인으로 변화를 만들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 내가 속한 시장이 잘 되어야 나도 잘 될 수 있다. 이 생각이 현실적인 건지 회의적인 건지 아직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내가 속한 시장의 조그마한 부정적인 변화에도 당시의 공포감이 되살아난다는 것이다.


얼른 자리를 옮기고, 노트북을 켠 뒤 글을 쓰며 다시 생각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들을 찾아낸 뒤, 최대한 걸러내고 현실을 직시하려 노력했다. 그러고 나니 새로운 사실이 보였다. 사실 내가 도전한 '모임'이라는 시장이 가라앉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해 있는 모임 플랫폼이 조금 주춤하는 것뿐이다. 내가 겪은 좌절감은 당시 트라우마가 만들어낸 것이다. 플랫폼의 소비자가 다른 통로로 옮겨가고 있는 건 오히려 긍정적인 신호일 수도 있다. '모임 시장'은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회는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내 트라우마가 긍정적인 신호를 막고 있는 것이었다. 결론은 보인다.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다른 경로의 모임도 개최하는 것. 오픈 카톡방, 인스타그램 내가 독자적으로 꾸민 페이지로 참가자들을 받아봐야 한다. 오히려 플랫폼이 주춤하는 상황을 기회로 삼을 수 있다.


다행이다. 예능 작가로 겪었던 패배감과 좌절감에 금방 나올 수 있어 다행이다. 나를 믿어주던 주변 사람들과 꾸준히 이어왔던 운동, 사람을 알게 했던 영화 책 덕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내 결심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 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 상황과 나 자신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앞으로도 수많은 불안감에 사로 잡힐 일이 많을 것이다. 그때면 오늘의 경험이 나를 구해줄 것이다. 그럴 때면 다시 현실을 직시하고 앞으로 나가볼 수 있는 길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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