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이 출연하는 예능을 2년 정도 했다. 작가들이 한 프로그램에서 일하는 기간은 길면 1년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2년은 굉장히 긴 시간이었다. 2년 동안의 일은 쉽지 않았다. 막내로서 자료조사, 섭외 등을 다 맡아서 했고, 당시 영어가 가능한 작가는 나 밖에 없었기 때문에 통역 업무까지 추가되었다. 한국어를 못하는 외국인 출연자와 인터뷰를 하거나 촬영을 할 때마다 나는 무조건 따라나서야 했다. 노트북 앞에서 하는 지루한 업무들, 촬영장에서 긴박하게 쏟아지는 상황들이 눈코 뜰 새 없지 바빴지만, 내가 좋아하던 한 순간이 있었다. 바로 방송 직후. 방송이 끝난 뒤 유튜브 클립이 공개되었을 때 댓글을 보는 것이 나의 낙이었다. 내가 애정을 쏟던 출연자에게 좋은 댓글이 달릴 때면 그 힘든 일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방송작가는 참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일반 직장에서 프로젝트에 하나에 돌입한다면, 결과를 보기까지 몇 년이 걸린다 들었다. 하지만 방송은 짧다. 오늘 촬영한 방송이 편집을 거치고 방송에 나가기까지 한 달이 안 걸린다. 한 달 내에 노력이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내가 섭외한 장소가, 내가 인터뷰한 출연자가, 내가 제시한 아이디어가 TV 화면에 나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의 좋은 평을 받는다면 그 힘든 일을 다시 하게 할 동기부여가 된다.
모임을 하면서도 방송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 모임이 끝난 뒤, 마음이 맞는 참가자 들은 자리를 옮겨 식사를 하러 가거나 간단하게 맥주를 한잔 하러 간다. 이때 일부러 식사자리에 참석하지 않는 모임장들도 많다. 참가자들과의 가까운 관계가 장기적인 모임 운영에 나쁜 영향이 있을 수도 있고, 모임이 끝난 후에도 본인이 분위기를 주도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다. 한 유명 모임장의 '뒤풀이 철학'을 듣고 난 뒤, 나도 처음에는 뒤풀이에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내 모임에 대한 피드백을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모임이 끝난 후 나가는 출연자들은 붙잡고 모임이 어떻냐고 물어보면 다 괜찮았다며 칭찬해 준다. 사실 그 자리에서 2시간 가량 진행한 호스트에게 비판적인 의견을 던지기 어렵다. 하지만 모임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분석과 쓴소리도 필요하다. 모임을 계속해서 발전시켜나가야 하지만 참가자들이 무엇이 만족스럽고 무엇이 불만족스러운지 알지 못했다. 전략을 변경했다. 그 후 모임이 끝난 후 뒤풀이를 주선하고 참석했다.
내가 모임이 더 좋아지게 된 때가 아마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물론 뒤풀이에서 개선점을 듣는 것도 만족스러지만 내가 더 좋았던 것은 '인정'이었다. 참가자들이 모임에서 무엇이 좋았는지, 어떤 부분이 기발했다고 느꼈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말해주었다. 이때까지 받지 못한 인정욕구가 뒤풀이에서 해소되었다. 방송일을 하며 피드백을 받고 내 노력이 인정을 받는 데까지 걸리는 한 달이라는 시간도 매우 짧다 생각했는데, 모임은 고작 10분만 기다리면 됐다. 모임이 끝난 직후 내가 고민했던 장치가 그들에게 어떻게 재미를 주었는지 칭찬받고, 내 기획 능력이 인정을 받으면 그것만 한 동기부여가 될 수 없다.
모임을 하며 점점 더 나에 대해서 잘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콘텐츠 기획을 좋아하고, 나름 잘하는 사람이다. 나는 '인정'과 '칭찬'은 큰 동기부여가 될 수 있고, 빠른 보상에 큰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다. 앞으로 나는 어디로 갈지 모르지만, 이정표가 하나씩 세워지며 곧 내가 바라던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는 긍정적인 생각이 조금씩 올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