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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까야 Jun 04. 2024

예능 작가하면 피디 될 수 있어요?

나를 예능 작가라고 소개하면 사람들의 질문은 대게 정해져 있다. 어떤 프로그램했어요? 연예인이랑 친해요?글 잘 써요? 등등. 늘 같은 질문이라도 관심에 대한 보답으로 성심성의껏 대답하려는 편이다. 나를 낮추면서 은근히 자랑하고, 방송작가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고, 방송일의 구조에 대해 그들의 눈높이로 설명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끔씩 멈칫하게 하는 질문이 있다. 내 직업에 대해 호기심을 가져주는 점, 나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는 점, 방송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점을 감안하고서도, 내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질문. 그건 바로 "예능 작가 계속하면 피디 될 수 있어요?"이다.


사실부터 말하면 절대 될 수 없다. 전혀 다른 분야이다. 작가들은 섭외, 인터뷰, 대본 작성 등 방송 전 구성에 필요한 작업들을 주로 하고, 피디들은 촬영 중 작가 포함 각 분야의 스태프들과 소통하며 전체 환경 연출하고, 촬영 후 영상 편집 등을 주로 맡는다. 메인 피디는 이 모든 것을 총괄한다. 대부분의 피디들은 대본을 써본 적이 없고, 대부분의 작가들은 편집 프로그램조차 만져 본 적 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라는 직업이 '피디'로 가는 과정이라고 가정하면 괜히 자존심이 상한다.


방송작가는 좋은 방송을 만들기 위해 잠을 줄이고, 출연자들 눈치 보고, 자료를 찾으려고 하루종일 모니터에 갇혀 있는다. 프로그램에 쓰는 절대적인 노력과 시간이 많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유명한 예능 피디는 많지만 유명한 예능 작가는 적다. 예능 포스터를 보면 피디들 이름만 나온다. 사람들은 예능이 성공한 공헌을 주로 출연자나 피디에서 찾는다. 왜 작가들이 피디들만큼 명성을 쌓을 수 없는지에 대해 항상 생각했다. 왜 방송이 끝난 뒤 스크롤을 보면 메인 피디이름이 먼저 나오는지, 혹시 가장 마지막에 주인공 처럼 나오는지 대해 불만을 품었다.


모임을 처음 시작할 때 나는 자신감이 넘쳤다. 내 기획력과 아이디어로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독창적인 모임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내 이야기라 라디오에서>라는 모임을 기획했다. 참가자들의 사연을 텍스트로 받은 뒤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고 아날로그 라디오로 재생하여 듣는 모임이다. 그렇게 낭만적이고 새로운 모임을 만들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내 모임이 아무리 재밌어도 사람들이 오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첫 번째로, 모임 상세페이지를 감성적으로 꾸며야 했다. 디자인 편집 웹사이트에 들어가 괜찮은 템플랫을 고른 뒤 텍스트를 적어야 했는데 너무 어려웠다. 잘 되는 다른 모임들의 디자인을 참고했지만,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어떤 디자인이 사람들이 좋아할지, 어떤 텍스트가 템플릿과 어울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다음으로는 모임을 알려야 했다. 내 콘텐츠가 잘 될 수 있는 카테고리를 선택해서 모임을 개설하고 매력적인 피드를 올린 뒤, 비슷한 모임을 했던 사람들에게 초대 메시지를 보내야 했다. 대낮에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으로 초대 메시지만 계속 보내는데, 답답해 미치는 줄 알았다. 모임을 하고 난 후 참가자들의 '후기'를 이용해 다음 모임의 신뢰도를 올리는 과정도 필수다. 끝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서도 알려야 한다. 나의 강점과 커리어를 잘 살려 사람들이 흥미를 느낄 캐릭터를 씌우고, 내 모임에 자연스럽게 유도해야 한다.


모임 사업을 하면, 좋은 모임을 만드는 게 다인 줄 알았다. 하지만 기획을 하는 게 끝이 아니었다. 내 모임을 디자인하여 감성을 자극하고, 마케팅하여 사람들에게 닿게 한 뒤, 나를 브랜딩 하여 장기적인 고객을 확보해야 한다. 기획은 그중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했다. 모든 분야에 전문가가 어야 내 모임이 성공할 수 있었다.


예능 프로그램 밖으로 나오고 알았다. 예능에서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프로그램을 디자인하고, 마케팅하고, 채널을 브랜딩 하는 팀이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해왔기 때문에 우리가 만든 프로로그램이 시청자들에게 가닿을 수 있었다. 작가가 쏟은 시간과 노력이 많으니 그만큼 명성을 받아야 된다는 건 참 오만한 생각이었다. 기획 팀이 프로그램의 중심이어야 된다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이었다. 시야를 조금 돌리면 작가들보다 노련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스탭 스크롤에 작가의 이름이 부각되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작가들보다 늦게 지나가는 수많은 부서들의 개개인의 이름에 관심을 가지고, 다 함께 일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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