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명대사 '바람과 흰 천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요'를 방송작가 버전으로 비틀어 보았다. '바람', '흰 천'처럼 고귀하고 거창한 것까진 필요 없고, 문서 작업이 주요 업무인 방송작가는 노트북이랑 와이파이만 있으면 카페, 공원, 차 어디서든 일을 할 수 있다. 드라마의 대사는 흰 돛을 단 요트에 바람만 불면 어디든 항해할 수 있는 '자유'를 상징한다. 얼핏 보면 방송작가도 노트북, 와이파이가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자유로운 직업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자유'가 아니라 '구속'임을 몇 년 간 처절히 느꼈다.
막내 작가 시절 유일한 취미는 헬스장 운동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선배에게 업무 지시가 내려오면 바로 실행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벤치프레스를 하다가도 언제든 노트북을 켜고 일을 할 수 있어 편리했다. 특히 자주 갔던 신촌의 한 헬스장에는 하반신만 찜질이 가능한 간이 건식 사우나 기계가 있었는데, 손 받침대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일하면 여느 카페 부럽지 않은 집중도 높은 업무환경을 느낄 수 있었다.
방송일은 평일밤, 주말에도 계속된다. 언제 어디서 돌발 상황이 터지기 모르고, 기획, 촬영부터 편집, 방영까지 가는 스케줄이 빠듯하기 때문에, 작가들은 항시 대기 상태로 있어야 한다. 모든 팀의 업무가 주말이라고 멈추는 게 아니다. 선배가 주말에 자료를 부탁했는데 만약 "저 지금 밖이라서 못 드릴 거 같아요"라고 말한다면, 막내작가로서의 기본 소양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막내작가로서 야외 활동은 절대 안 됐고,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힘들었다. 언제 어디서든 일이 올 지 몰랐기 때문이다. 일이 정말 많을 때면 주말에 헬스장조차 가지 못할 때도 많았다. 문서 작업을 하나씩 처리하고, 선배에게 전송하고, 피드백을 받아 수정하고, 다시 내려오는 새로운 작업을 처리하는 끝나지 않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일요일이 훌쩍 가있었다. 너무 배가 고파서 편의점을 향하려고 현관문을 열었는데, 마침 급한 업무 지시가 내려와 방으로 다시 후다닥 돌아올 때도 많았다. 집이 감옥처럼 느껴졌다. 집에서 쉬지 못하고 일만 했다. 얕은 잠을 자다가 작가들 카톡방의 의미 없는 메시지에 놀라 자주 눈을 떴다. 업무지시인 줄 알았다. 집에 불어오는 산뜻한 바람이 그렇게 야속했다.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좋은 작가가 되는 과정은 험난했다. 자유롭지 못하고, 불안해하고 아등바등했다. 젊은 시간을 일에 고스란히 헌납했다. 꿈을 이루는 과정은 원래 이렇게 괴로워야 되는 줄 알았다.
최근 기획한 모임 중 스페인어 모임이 있다. 가장 잘 되는 모임 중 하나이다. 어제 외국인 친구와 새로운 스페인어 모임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유인물, PPT의 문구 하나하나를 의논하며 준비했다. 오후 6시에 퇴근한 친구를 만나, 11시까지 일하고 집에 돌아 올 계획이었다. 하지만 친구의 컨디션 난조와 과소평가한 업무량 때문에 일이 결국 다음날 새벽 6시까지 이어졌다. 한창 방송일을 할 때 밤샘 작업이 정말 싫었다. 정신을 온전히 컨트롤할 수 없는 느낌이 불쾌했다. 일이 많아지면 피곤하더라도 가급적 새벽에 일어나서 일을 하려고 했다. 모임일을 하면서까지 밤샐 줄은 몰랐다.
모임 사업을 시작하며 새로운 도전들을 많이 해보고 있다. 최근에는 브랜딩과 마케팅에 관한 서적들, 그토록 싫어했던 '성공'에 관한 책도 찾아보고 있는 중이다. 돈만 외치는 책들에 반감을 가졌지만, 요즘에는 운전 중에도 오디오북으로 자기 계발 서적을 듣는다. 성공한 사람들의 인사이트를 어떻게 내 일에 접목시킬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린다. 이렇게 모임 기획, 책 읽기, 글쓰기, 최근 시작한 방송 아르바이트까지 하다 보면 일이 정말 많다. 평일 밤, 주말에도 일 하고 어제처럼 밤샘까지 하다 보면 워라밸이란 건 내 인생에 없는 단어인가 싶다. 더군다나 지금 하고 있는 절반의 일은 수익이 없다.
하지만 방송일과는 다르다. 재밌다. 돈을 못 벌어도, 무지에 대해 자각하는 날의 연속이라도 재밌다. 친구와의 밤샘 작업이 만족스러웠다. 하루종일 집 안에서 일해도 갇혀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원하는 목표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느낌이 든다. 책과 글과 사람들 속에서 오히려 자유로움을 느낀다. 선배가 시키는 일이 아닌, 내가 내 일을 정하고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럽다. 방송일을 되뇌어보면 참 '치열'했다. 하지만 몇 년 뒤 지금을 돌아보면 참 '열심히' 살았다며 뿌듯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 동기부여 강연자들이 말하는 '노력'을 들으면, 원룸에 갇혀 지내던 막내 작가 시절을 떠올리며 위로했다. 하기 싫은 걸 꾸역꾸역 참으며 억지로 하는 것이 노력인 줄 알았다. 자존심 굽히며 꿈을 꾸는 것이 노력인 줄 알았다. 하지만 최근 '노력'에 대해 조금 다르게 정의한다. 목표에 몰입하고 조금씩 재밌게 나아가도 그건 노력이다. 시스템에 속하지 않고, 마음대로 길을 정해 조금씩 나아가는 것도 '노력'이다. 열심히 기획한 모임이 영원히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다. 평생 아이디어를 펼치지 못하고 제3의 영역으로 도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보고 듣고 겪은 건 언젠가 나를 예상치 못한 설레는 곳으로 안내해 줄 거라는 확신이 든다. 방송일에 벗어나고 나서야 자유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