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말고, 근교] 3-1. 도덴 아라카와선 하루 여행
도쿄는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여행지입니다. 그만큼 각종 정보가 넘치는 곳이기도 합니다. 유명한 관광지를 이미 방문했다면 이번엔 ‘도쿄 말고, 근교’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이 연재에서는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도쿄 도내와 도쿄 근교 여행지를 소개합니다. 색다른 일본 여행지를 찾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20년 전 도쿄에서 살던 때가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20대에겐 모든 것이 비싸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도쿄가 서울보다 저렴하게 느껴진다. 엔저의 이유도 있지만, 지난 20년 동안 일본에 비해 한국의 물가가 크게 상승한 영향이 크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본에서 비싼 것은 교통비다. 도쿄 전철의 기본요금은 180엔인데, 구간마다 가격이 오르는데다 노선마다 따로 요금을 내야 한다. 환승이라도 하면 편도 300~400엔이 훌쩍 넘기도 한다.
이렇게 비싼 도쿄의 교통비지만, 400엔만 내면 하루 종일 이용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2024년 4월 기준). 바로 도덴 아라카와선(都電荒川線)의 일일 승차권을 사는 것이다. 도덴 아라카와선은 지면 위를 달리는 한 량짜리 노면 전차다. 노면 전차는 전기로 운행되기에 친환경적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이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라져간 노면 전차지만, 아직 도쿄의 서북쪽에서는 훌륭히 시민들의 발 역할을 하고 있다. 여행자에게도 이 노선은 특별한 즐거움을 주는 코스다. 이 전차가 달리는 와세다 역에서 미노와바시 역까지의 구간은 도쿄 사람들의 일상으로 녹아들어갈 수 있는 여행지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람이 많은 관광지를 찾기보다 천천히 걸으며 일상의 발견을 즐기는 여행자에게 추천한다.
도덴 아라카와선 전차 여행의 매력은 다양한 삶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인생은 청년이다. 도덴 아라카와선의 시발역인 와세다 역에서 5분 정도 걸으면 와세다 대학이 나온다.
바쁘게 오가는 대학생들을 따라 캠퍼스 안으로 들어가면 두부처럼 하얗고 네모난 건물을 물결 같은 목조 구조물이 둘러싸고 있는 독특한 건물이 나온다. 이 건물의 정식 명칭은 와세다대 국제문학관, 하지만 보통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으로 불린다. 이 대학 졸업생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기증한 친필 원고와 서적, 음반 등으로 세워진 공간이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968년 와세다 대학 제1 문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처음에 소설가가 아니라 각본가를 꿈꿨다고 한다. 이 국제문학관은 그가 즐겨 찾던 연극박물관의 바로 옆 강의동을 리모델링해 만들어졌다. 이 프로젝트를 담당한 건축가 쿠마 겐고는 독자들이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며 새로운 시간과 공간으로 빠져드는 것을 형상화해 물결 모양의 목재 구조물과 터널 같은 내부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건축가의 의도대로 마치 빨려 들어가듯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을 연결하는 거대한 아치형 나무 계단 책장이 나온다. 이 책장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세계를 만날 수 있는 책들뿐 아니라, 각 나라의 영화감독이나 작가들이 소개하는 책들이 소개되어 있다. 한국의 이창동 영화감독이 추천한 책도 소개되어 있었다.
지하 1층에는 작가의 서재를 재현한 공간과 카페가 있고, 지상 1층에는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갤러리 라운지와 오디오 룸이 있다. 라운지에서는 그의 작품 연보를 볼 수 있어, 매일 꾸준하게 집필하는 소설가의 저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2층은 방송 스튜디오와 기획 전시 공간, 3층은 연구 공간이다.
이 도서관은 분명 책이 주인공이지만,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매력적인 공간이다. 이곳의 오디오 룸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기증한 재즈 LP 컬렉션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오디오룸은 작가의 음향 자문인 오노데라 히로시게가 세팅한 곳으로, 작가가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사운드 환경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지하 1층 카페에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운영하던 재즈 카페 '피터캣'에서 라이브 연주를 하던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기도 하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학 시절은 어땠을까? 그가 입학하던 1968년은 일본 내 대학에서 학생운동이 최고조로 달하던 시기였다. 개관 당시 인터뷰에서 하루키는 이 건물은 한때 학생들이 "대학 해체"를 외치며 점거했던 공간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이 슬로건이 일방통행적인 가르침을 타파하고, 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대학을 만들고자 하는 학생들의 열망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단지 방법이 잘못되었을 뿐 당시 청년들의 이상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인터뷰 출처: https://book.asahi.com/article/14450237).
지금 이 국제문학관의 슬로건은 "이야기를 발견하자, 마음을 전하자(物語を拓こう、心を語ろう)"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직접 지었다고 한다. 그는 이곳을 개관할 때, 학생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거침없이 내놓고 실현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비록 그 시대 청년들이 외쳤던 슬로건은 미완으로 끝났지만, 그 이상만은 이런 형태로 남아 다음 세대에 전해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와세다 대학만 방문하기 아쉽다면 근처 정원을 돌아볼 수 있다. 간다 강 건너편에 있는 히고 호소카와 정원(肥後細川庭園)은 옛 구마모토 번주의 별장이었다. 정원을 산책하고 일본식 녹차를 마시는 체험을 해볼 수 있다.
와세다 대학 왼쪽의 칸센엔 공원(甘泉園公園)은 에도 시대 유력 가문이었던 시미즈 가의 별장이었다. 전쟁이 없던 에도 시대의 무사들은 전공을 세우는 대신 저택과 별장의 정원을 가꾸며 독특한 정원 문화를 만들어 냈다. '다이묘 정원(大名庭園)'이라 불리는 이런 정원들은 오늘날 도쿄 곳곳에 시민들을 위한 공원으로 남아 있다.
와세다 역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낸 후, 다시 도덴 아라카와선 전차를 타러 갔다.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도 와타나베가 수선화를 들고 미도리의 집을 방문할 때 이 전차를 타는 장면이 나온다. 일요일 아침, 주택가를 스치듯이 달리는 전차 안에서 그가 바라보던 풍경들은 아마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와세다 역에서 두 정거장을 가면 키시보진마에 역이 나온다. 역에서 내려 오른쪽 주택가로 향하면 수령 400년이 넘는 느티나무가 우거진 골목길이 나온다. 조시가야 키시모 신당(雑司ヶ谷鬼子母神堂)으로 향하는 참배로다. 이곳은 귀자모신(鬼子母神)이라는 불교의 호법신을 모시는 곳이다. 과거 이 지역에서 귀자모신의 석상이 발견된 것이 이 신당의 기원이라고 한다.
귀자모신은 임신과 출산, 자녀 양육의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인도에서 하리티(Harit)라고 불리던 야차(불교의 귀신)였다. 그녀는 천 명의 아이를 둔 어머니였지만, 다른 사람들의 아이를 잡아먹는 잔인한 습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가 원래부터 야차였던 것은 아니다. 여러 생을 거치며 첩에게 거듭 자식을 잃게 되었는데, 결국 그 원한이 그녀를 야차로 만들었다. 포악한 그녀에게 자식을 잃은 사람들은 비탄에 빠졌고, 이 이야기를 들은 부처님은 그녀의 막내아들을 납치해 발우(불교에서 공양할 때 사용하는 밥그릇) 속에 숨겼다. 그리고 미친 듯이 아이를 찾아 헤매던 하리티에게 이렇게 말했다.
"천 명 중의 하나인 자식을 잃은 네 마음이 이렇게 아픈데, 하나뿐인 자식을 너 때문에 잃은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느냐?"
그녀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크게 반성하고 불법에 귀의하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야차가 아니라 아이들을 보호하는 여신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일본의 절에서 만나는 귀자모신의 모습은 주로 한 손에는 아이를 안고 있고 다른 손에는 길상과(吉祥果, 석류)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키시모 신당의 편액을 보면 귀(鬼)자 맨 위의 점이 없다. 이게 그녀는 더 이상 귀신이 아니기에, 귀(鬼)라는 글자에서 뿔(丶)을 뺀 것이다.
경내 분위기를 압도하는 것은 높이 33미터 둘레 11미터의 거대한 은행나무다. 수령 700년의 이 은행나무는 불임에 영험하다는 속설이 있다. 이 절의 또 다른 명소는 카미카와구치야(上川口屋)라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과자 가게다. 1781년에 창업해 지금 13대째 주인이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당시에는 구하기 힘들었던 사탕을 팔았지만, 지금은 다양한 막과자를 팔고 있다. 초등학생 때 학교 앞에서 사 먹던 군것질거리와 비슷한 느낌이다. 경내에는 아이와 함께 참배하러 온 사람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이 세상 모든 아이의 소중함을 아는 귀자모신에게 아이의 무탈함을 비는 것이다.
도덴 아라카와선을 타고 와세다 역을 출발해 키시진보마에 역을 지나 고신즈카 역까지 왔다. 이 근처에는 도쿄 소메이 온천 사쿠라가 있다. 도심에서 즐길 수 있는 종합 온천 시설이다. 노천 온천도 있고 사우나도 있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탕은 자칫 방심하면 떠밀려 내려갈 정도로 물살이 강한 버블탕이었다. 하지만 90살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도 굳건히 버티는 것을 보며 ‘진정한 강함이란 신체가 아니라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이 근방은 우리가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벚꽃인 왕벚나무(소메이 요시노 사쿠라)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일본의 벚꽃은 원래 꽃과 잎이 함께 피는 산 벚나무였다. 하지만 에도 시대에 이 지역의 원예사가 지금처럼 잎이 나기 전에 꽃이 먼저 피는 왕벚나무를 개량했다고 전해진다. 바로 근처인 고마고메 역에 소메이 요시노 벚꽃 기념 공원이 있다.
고신즈카 역에서 내리면 스가모 지조도리와 이어진 상가거리가 나온다. 스가모는 노인들의 하라주쿠라고 불리는 곳으로 고령층을 대상으로 한 가게가 많은 지역이다. 실버카를 끄는 어르신들의 비중이 단번에 늘어난다. 타 지역에 비해 물가가 저렴한 편인데, 가장 저렴한 것은 약국에서 살 수 있는 파스나 소화제 등 의약품이다. 도쿄는 늘 바쁘고 정신없는 느낌인데, 이곳의 풍경은 언제 방문해도 변함없이 느긋하게 흘러간다.
청년들의 와세다 대학, 아이들의 키시모 신당을 거쳐, 이제는 노인들의 거리 스가모에 서 있다. 벌써 인생을 한차례 산 기분이다. 나이를 한 살씩 먹을수록 무슨 큰일이라도 난 양 매년 호들갑을 떨어대지만, 사실 소란 떨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차가 도착하면 올라탔다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내리는 것처럼, 그저 자연스럽고 평범한 일이 아닐까. 낡고 오래된 전차 안엔 장을 보고 돌아오는 할머니, 유모차를 끌고 탄 젊은 부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학생들 그리고 지나가는 여행자인 나까지 모두 천천히 다음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다. 누구 하나 특별할 것 없이, 모두 평범하고 또, 특별한 일상이었다.
*도덴 아라카와선 2부로 이어집니다.
▶여행정보
-도덴아라카와선 1일권 사는 법
오지 역에는 승강장에 역무원이 있어 탑승 전 구매가 가능하다. 하지만 다른 역은 모두 무인역이기에, 전차에 탑승 후 운전수에게 “1일 권 주세요(1日券ください)”라고 말하고 준비해 둔 400엔을 내면 탑승권을 발급해 준다. 그 후 탑승할 때마다 운전수에게 탑승권 날짜가 잘 보이게 보여주며 타면 된다.
-와세다대학국제문학관 早稲田大学国際文学館(村上春樹ライブラリー)
무라카미 하루키가 기증한 친필 원고, 집필 자료, 도서, 음반 등 약 1만여 점의 소장품이 있는 공간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 연구와 국제적인 문화 교류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만들어졌다. 입장료 무료.
【주소】 東京都新宿区西早稲田1-6-1
【개관시간】 10:00-17:00
【휴관일】 매주 수요일
【전화 번호】 03-3204-4614
【홈페이지】 https://www.waseda.jp/culture/wihl/en
【가는 법】 도덴 아라카와선 와세다 역 하차 도보 5분
- 조시가야 키시모 신당(雑司ヶ谷鬼子母神堂)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한 신당으로 불교의 호법신인 귀자모신을 모시고 있다. 경내에는 수령 700년이 넘은 은행나무와 이나리 신사, 귀자모신상, 1781년부터 운영되던 과자가게인 카미카와구치야(上川口屋)가 있다.
【주소】 東京都豊島区雑司が谷3-15-20
【개관시간】 06:30-17:00
【전화 번호】 03-3982-8347
【홈페이지】 https://www.kishimojin.jp/
【가는 법】 도덴 아라카와선 키시진보마에 역에서 도보로 2분
▶함께 보면 좋을 드라마 <우먼 (2013)>
일본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키시모신당을 방문하기 전에 <우먼(2013)>을 시청해 보길 권한다. 일드 <우먼>은 작년에 개봉한 영화 <괴물>의 극작가인 사카모토 유우지의 작품으로, 남편이 죽은 후 혼자 두 아이를 키우던 코하루가 불치병에 걸리게 되면서, 20년 전 자신을 버린 엄마 사치와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사치 역은 영화 <괴물>의 교장선생님 역으로 나온 다나카 유코다. 복잡한 사연을 지닌 이 엄마가 키시모 신당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여러 번 등장한다. 키시모 신당의 유래를 알고, 이 드라마를 보면 드라마의 내용들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