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별 Jun 05. 2024

새 일기장에 새 일기장 사고 일기 쓰는 일기

23.10. 14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서점을 두 바퀴 돌았다. 대부분 전자책으로 독서를 하고 있지만 얕은 구멍에 카드를 끼워 넣는 간단한 행위와 맞바꾸어 손쉽게 문진을 손에 넣었다. 문진이 너무 반짝거렸던 탓이다. 내 탓 아니고 문진 탓.


집을 나설 때와 달라진 가방 속을 의식하며 더해진 죄책감의 무게가 적당하게 치환될 정도의 시간만큼 뜸을 들여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유리액정을 몇 번 두드려 이미 장바구니에 담겨있던 일기장과 노트들을 주문한다. 아까 문구류 코너는 몇 바퀴 돌았더라.


북적이는 지하철 안에서 배려라는 명목의 불쾌로 가방을 품에 안고는 상당한 것을 얻은 기분에 휩싸였던 것 같은데, 머리 위로는 오늘 무얼 얻고 돌아가는 건가 하는 질문이 맴돈다.


지하철을 벗어나 선선한 공기가 머리에 닿으니 방금까지 온몸을 채우던 둔탁한 생각들이 순식간에 흩어진다. 바쁘게 걸으며 비워진 머릿속으로 잔뜩 주문한 종이뭉치들의 쓰임새를 나눠본다. 날이 갈수록 기록할 것들이 늘어난다. 아니 기록하고 싶은 것들이. 아니 이것도 아닌가. 어쩌면 기록을 해야 할 것만 같은 마음에 허덕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떤 인생이든 아쉬움을 배우게 되니까.

  

무엇도 주어지지 않았을 때는 저 멀리 아득한 공허에 숨이 턱. 하나 둘 가지기 시작하면 우습게도 놓친 것들만 우르르 지천에서 날카롭게 살을 스친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는 표현은 사뭇 패기 넘치게 들리고, 잃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게 인생이라는 표현이 더 와닿는 걸 보면 어느새 돌보지 못한 소회들이 적지 않게 쌓였나 보다. 심지어 잃기만 할까 싶은 불안에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때를 빼고 광을 내고, 뭐든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것을 보니. 눈을 감고 느리고 깊게 호흡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데, 여전히 조급하다. 아직은 이런 사람이라 살기 위해 자꾸만 심호흡을 하게 되나 보다.


어두운 방에 앉아 소박한 조명을 켠다. 자그마한 좌식 테이블. 올해가 지난 만큼 익숙해진 노트 위로 하루가 내려앉을 곳만이 비춰질 한 뼘만큼의 빛. 주름살 하나 없는 판판한 종이의 감촉에 안정감이 도진다. 펜을 쥔 손이 움직이는 박자에 맞춰 나의 오늘이 글이 되어 내려가는 소리가 울린다. 반듯하게 쌓인 종이 사이에 간직된 시간이 조금은 더 오래 곁에 머물러 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펜 뚜껑을 닫고 일기장을 덮는다. 슬픔도 아쉬움도 함께 덮여가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