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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균 Mar 20. 2023

감정을 소비하는 법

한결같이 웃어주는 당신에게

감정. 백억 개 이상의 신경세포로 이루어진 뇌에서 보내는 신경전달물질의 집합체입니다. 다른 맹수에 비해 날카로운 발톱조차 없었던 우리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임을 배웠고 공동체에서 벗어나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기에 내 주위 사람들의 감정을 읽고 대응하는 능력은 필수 생존능력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건 현대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수많은 강연과 책에서 남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말고 소신대로 행동하라지만 20만 년 동안 내 몸속 깊이 축적된 생존 전략 DNA를 무시하긴 쉽지 않습니다. 내가 힘들게 쌓아 올린 관계의 모래성이 무너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쉽사리 드러내질 않습니다. 자신이 무심코 흘린 부끄러운 감정들이 혹여나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 내 감정을 보여주기보다 밤늦게 집에 돌아와 멍하니 샤워를 하며 김이 서린 뿌연 거울 속 희미하게 비친 내 모습을 향해 한숨을 쉬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렇게 한숨을 쉬는 것만으로 자신의 감정이 무심코 킨 환풍기를 타고 밖으로 나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만 나를 어딘가 불편하게 만드는 감정들은 그렇게 쉽게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학창 시절 기가 시간에  나 전달법과 너 전달법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지만 단지 3시간에 걸친 수업만으로는 부족했을 겁니다. 저 역시 기가 시간에 기억나는 건 넓은 교실에 벤치프레스를 갖다 놓고 가뿐하게 바벨을 드는, 콧수염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던 선생님이 기억날 뿐입니다.


잠깐 가족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저의 경우 누나가 한창 화장을 하고 교복을 입기 시작할 무렵 빼빼로 데이 때 아무 생각 없이 책상 위에 올려진 화이트 쿠키 빼빼로를 먹은 동생을 가여이 여기지 않고 바락바락 3시간 동안 화를 냈던 누나가 있어서인지 화를 잘 안 내는 성격이 돼버렸습니다. 괜히 저도 그 자리에서 누나와 말다툼을 하고 화를 내다 부모님 눈 밖에 나 둘 다 집에서 쫓겨난 경험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죠. 집에서 안전하게 살고 싶으면 화를 참고 뒤에서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 초등학교 3학년이 취할 수 있었던 최선의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사춘기가 끝난 지금의 누나는 월급날 가끔 저의 간식도 같이 사다 주는 착한 어른이 되었으니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미래의 매형은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 같습니다.


화를 안 내도 불행하지 않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던 이유는 항상 제 주위에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굳이 그 자리에서 감정을 소비하지 않아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어느 누군가가 다가와서 울음을 닦아주고 오직 제 시선에서 저의 잘못은 쓱 걷어놓은 채 이기적이게 풀어낸 이야기라도 전적으로 믿어주고 응원해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인복이 있었던 걸까요.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도 너무 좋은 사람들을 만나 울고 웃었던 기억은 아직까지도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저의 감정을 소비하는 방법은 제 주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제일 애용하는 방법이지만 문제는 제가 이 방법 외에는 감정을 소비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주위 사람들과 하나 둘 멀어지고 감정을 소비할 기회가 줄어들면서 화를 내는 방법을 잘 몰랐던 저는 어딘가 저를 괴롭히는 감정들을 소비하지 못한 채 마음 한 켠 빈 공간에 꾹꾹 눌러담았습니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라는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실제로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그러한 시간들을 이미 꽉 차 버린 마음 한 켠에 쌓아두기에는 더 이상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밤에 잠을 자기 위해 자리에 누워도 쓸데없는 잡념과 생각들이 머릿속을 이리저리 헤집어놓았습니다. 어딘가에 이 감정과 생각의 수도꼭지를 틀어버리고 싶었는데 마땅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찮게 대학 동아리 선배의 블로그 글을 클릭 몇 번을 통해 보게 되었습니다. 대리만족이라 해야 할까요. 자신이 느끼고 느꼈던 감정을 적나라하게 써 내려간 글은 저에게 이유 모를 해방감을 주었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한 건 그날부터였습니다.


먼지가 수북이 쌓여 엔터키가 잘 눌리지도 않는 오래된 타자기로 제 맘속 어딘가에 쌓여만 가는 감정들과 고민들을 풀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머릿속에 생각나는 모든 생각과 감정들을 무작정 적기 시작했습니다. 비공개였던 글을 하나씩 모아 다듬기 시작했습니다. 짤막한 구절과 단어 하나에서 문단으로, 비슷한 고민을 가진 문단을 묶어 하나의 글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글을 쓴다고 하여 제 감정과 고민들이 모두 해결되진 않았지만 해답이 나오지 않아도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은 그때 느꼈던 해방감을 다시금 느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고민덩어리에 반응해 주신 당신 덕분에 고민의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즐겁습니다. 빠르게 넘어가는 파편적인 정보의 연속체인 인스타 스토리의 링크를 타고, 또는 브런치 앱을 클릭해 새로운글을 새로 고침하며 거의 A4 한 페이지나 되는 글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노동을 요하는지 알기에 제 글을 읽어 주신 당신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앞으로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진 글이 올라올진 모르지만 사소한 생각과 고민조차 모두 이곳에 나누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이곳은 저와 당신의 감정 쓰레기통이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그래도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으니 당신은 분리수거가 잘 돼있나 확인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은 어딘가 고마운 사람들이 많이 생각나는 글입니다. 당신도 이참에 문득 생각난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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