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 정확한 뜻은 모르나 대충 넷플릭스나 왓챠 따위를 이르는 단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혹시 모릅니다. 당신이 유퀴즈에 나가 OTT가 뭐의 줄임말인지 맞춰야 될 수도 있으니 잠시 알려드리자면, OTT는 Over The Top의 약자로 여기서 Top은 티비 뒤편 어딘가에 있는 셋톱박스를 뜻합니다. 대충 셋톱박스 없이도 콘텐츠를 볼 수 있다는 뜻으로 생각하면 될 거 같습니다. 전자기기에 대한 불신이 있으셨던 저희 부모님은 제가 유치원을 들어갔을 무렵 초록색과 빨간색이 섞인 화면조정 노이즈가 나오던 TV를 버리시고 그 자리를 커다란 책장 3개로 가득 채우셨습니다. 물론 저와 누나가 책장을 책이 아닌 인형과 건담 피규어로 채워놓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셨던 거 같습니다.
TV가 없어 드라마 본방사수를 하지 못했던 저는 학교 친구들이 별그대 천송이가 도민준이 외계인이라는 걸 언제 알아챌지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일 때면 헐레벌떡 집에 뛰어가 아버지가 쓰시던 컴퓨터로 불법 다시보기 파일을 뒤적거리는 날이 일쑤였고 설날 세뱃돈을 엄마에게 맡기면 나중에 모아서 한꺼번에 준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었기에 세뱃돈보다 할머니 댁에서 하루 종일 TV를 볼 수 있다는 게 설날이 기다려지는 유일한 이유였습니다.
지금은 원하는 드라마를 보기 위해 불법 토렌트 사이트를 뒤적거리거나 온 가족들과 함께 선정이가 과연 누구의 딸인지 토론하며 거실에서 본방사수를 하는 사람들은 잘 없을 겁니다. 커피 한잔 값이면 내가 원하는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기 때문이죠. 콘텐츠에 대한 간절함이 10년 전에 비해 사라진 느낌이랄까요. 기대하는 영화는 조금만 기다리면 침대에 누워서 공짜로 볼 수 있는데 굳이 영화관에 갈 필요성을 못 느낍니다. 영화관에 가느니 차라리 그 돈으로 내 방에서 허니콤보와 맥주 한 캔을 먹으며 커튼을 치고 편안히 보는 게 훨씬 이득이라는 좌뇌에 합리적인 결정에 따르고야 마는 거죠.
그럼에도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 영화 그 자체를 엄청 좋아하는 영화광까진 아니지만 보고 싶은 영화가 나오면 꼭 영화관을 가는 편입니다. 여담이지만 영화값이 너무 비싸 어떻게든 할인 혜택을 끌어모으는 걸로 영화관 가격 정책에 소심한 저항을 하고 있는 저이기에 이 글을 읽고 계신 영화관 3사 관계자분들은 맨큐 경제학 원론에 나오는 가격탄력성에 관한 부분을 한 번쯤 읽고 다시 가격 설정을 해보는 것이 어떨지 추천드립니다.
영화관을 가는 이유는 저마다 다를 겁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와서, 큰 화면으로 CG를 생생하게 느끼고 싶어서, 아니면 썸을 타는 친구와 밥을 먹기 전 마땅히 시간을 때울 만한 장소가 없어서 등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영화관을 찾습니다. 저도 위에 이유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만 이것 말고도 하나를 더 꼽으라면 바로 사운드입니다. 콘텐츠에서 음악이 주는 효과는 대단합니다. 똑같은 장면이라도 어떤 음악을 사용하는지에 따라 관객이 눈물을 흘릴지, 아니면 흔해 빠진 억지 신파로 치부해버릴지 갈리기도 합니다. 또한 어떤 음악을 사용하는지 뿐만 아니라 어떻게 음악을 활용하는지도 영화 관람의 큰 매력 포인트 중 하나입니다. 혹시 이번에 나온 영화 '슬램덩크'를 보셨나요? 단순 애니메이션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이 영화는 꼭 영화관에 가셔서 보시기 바랍니다. 긴박하고 극적인 음악이 나와야 할 시점에 오히려 모든 사운드를 제거하고 적막만이 차지하는 마지막 5분의 경기 장면은 가히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사운드가 선사하는 매력에 크게 이끌려서 그런지 특히 음악 영화는 되도록 영화관에서 꼭 보고자 하는 편입니다. 개인적으로 위플래쉬와 라라랜드의 감독인 데미언 샤젤 감독을 좋아하는데요, 음악이라는 장치를 관객에 뇌 속에 확실히 각인시켜 영화가 끝난 뒤에도 아직도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여운을 남겨주며 OST 앨범을 다운받아 집에 돌아가는 버스에서 들으면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재미와 감동이 그대로 살아나게 됩니다. 혹시라도 퇴근길이나 출근길에 길이 막혀 화가 머리끝까지 나신다면 라라랜드의 'Another Day of Sun'을, 사람들이 바글거려 발 디딜 틈도 없는 롯데월드에서 내가 주인공이 되어보고 싶다면 'Someone In The Crowd'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잠깐이지만 일상이 영화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실 겁니다.
꼭 음악 영화가 아니어도 됩니다. 영화는 음악감독이 따로 있을 정도로 사운드에 신경 쓴 예술작품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영화를 보아도 집에서 스마트폰의 조그만 스피커에서 나오는 사운드와 많게는 73개의 압도적인 크기로 관객을 둘러싼 스피커에서 나오는 사운드의 차이는 명확합니다. 눈앞을 꽉 채운 스크린에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사운드를 가만히 느끼고 있으면 똑같은 영화라도 집에서 소파에 앉아 인스타 스토리를 넘기면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집에서 편안히 봤는데도 당신에게 적적한 감동과 여운을 안겨준 영화라면 영화관에서의 그 영화는 당신에게 한 달 동안 그 영화밖에 생각나지 않게 만들 것이라 확신합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제가 어벤저스 엔드게임을 보고 한 달 동안 캡틴 아메리카에 빙의해 어벤저스 OST를 들으며 허구한 날 볼펜을 들고 '어벤저스 어셈블'을 외쳤었거든요.
혹시라도 넷플릭스, 왓챠, 티빙, 애플티비를 다 구독해놓고 더 이상 '더 글로리' 말고는 볼 게 없어 유튜브에 '영화 추천 결말 포함'을 검색하고 그마저도 1.5배속으로 보고 계시진 않은가요? 영화관에 가보신지 꽤 되셨다면 약간의 귀찮음을 이겨내고 만 원만 들고 극장가에 가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카드나 학생증이 만족할 만한 할인 혜택을 제공해 줄 터이니 가서 시간대에 맞는 아무 영화나 한편 보고 오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겁니다. 특히 '바빌론' 같은 영화를 보시고 포스터 한 장을 가져와 내 방 벽지에 붙여 놓으면 놀러 오는 지인분들에게 당신이 고급 취향을 가진 문화인이라는 느낌을 줄 수 있으니 영화 바빌론도 추천드립니다. 실제로도 아주 재밌습니다. 바빠지는 3월이 오기 전에 잠깐 폰을 꺼두고 2시간만 당신에게 할애해 주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