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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균 Mar 20. 2023

웃을 줄 아는 용기

그 자체로 빛나는 당신에게

경쟁. 한정된 자원을 얻기 위해 벌이는 생명체들의 싸움입니다. 당신이 무심코 지나쳤던 아스팔트 위 잡초들도 더 깊게 뿌리를 내리기 위해 이제 막 노란 꽃잎이 보이는 민들레와 악착같이 싸우는데 인간들은 얼마나 잔인할까요. 사회까지 나갈 필요도 없습니다. 당장 고등학교만 해도 작은 정육면체 속 25명이 서로의 감정을 속이며, 아니 나 자신까지 속이며 더 높은 등급을 받기 위해 점심으로 맛있는 스파게티가 나온 날에도 눈은 고등필수 영단어 모음집에 고정한 채 19년간 밥을 먹던 감각으로 숟가락을 쳐다보지도 않고 입에 영양소를 때려 넣는 친구들이 테이블마다 한 명씩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두 한정된 자원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홍삼, 유산균, 비타민 C, D, E 등 부모님이 보내주신 각종 영양제와 보약을 입에 털어 넣으며 어떻게 졸음을 이겨낼까, 어떻게 하루에 12시간씩 공부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느지막이 잠자리에 들 때면 뿌듯함과 불안감이 동시에 찾아옵니다. 이렇게 힘든 하루를 버틴 나 자신이 대견스러우면서 이렇게까지 했는데 이번 시험에서 또 등수가 안 오르면 다음에는 어떡하지라는 불안감, 아니 공포감까지 듭니다. 뿌듯함은 반가운 손님이지만 불안감은 쉽사리 떨쳐내기 힘듭니다. 이 불안감은 경쟁에서 이기면 자연스레 없어지지만 패배했을 시 내 자아를 완전히 망가뜨립니다. 나의 최선을 넘어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면서까지 노력했음에도 결과가 형편없다면 오로지 결과의 책임은 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실패할 수 없는 상황과 노력을 했음에도 실패했다면 한동안 당신은 꽤나 깊은 좌절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아예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여전히 그 좌절의 늪에 있을 수도 있겠군요.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뭐라고 당신에게 주제넘게 조언을 하며 이렇게 해보자, 저렇게 해보자 하겠습니까. 다만 오늘 넷플릭스를 뒤적이다 당신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장면이 있어 글을 끄적이는 것입니다.  '피지컬 100'이라고 넷플릭스에서 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100명의 참가자들의 육체적 서열을 매겨 최후의 1인을 겨루는 내용입니다. 아직 모든 회차가 공개되진 않았지만 제가 본 장면은 2명이서 3분 동안 공을 사이에 두고 혈투를 벌이다 마지막에 공을 잡은 1인만 살아남는 장면이었습니다. 게임에 참여한 참가자 모두 엄청난 경기력을 보여줬고 그들의 간절함은 6인치짜리 스마트폰에까지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게임에서 진 참가자들은 아쉬웠는지 소리를 지르기도, 초점 없는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참가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3분 동안 모래밭에 얼굴을 처박히고, 흙탕물을 먹고, 살이 까지면서까지 승부가 안 나 결국 연장까지 돌입한 경기였습니다. 치열한 경기 끝에 결국 상대방이 우승을 차지했고 그 참가자는 졌습니다. 그런데 경기가 끝나고 다른 참가자와 달리 활짝 웃는 그 모습에 몇 번이고 화면을 멈추고 다시 봤습니다. 자신의 온몸이 흙으로 뒤덮인 상황에서, 자신의 최악까지 보여주면서 최선을 다했음에도 졌는데 울기는커녕 웃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활짝요. 평소에 웃음이 많은 참가자인지 아니면 감정을 담당하는 신경세포가 망가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시험에서 1점 차이로 2등급을 맞거나, 체스에서 폰 하나 차이로 져 본 경험이 다들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근소한 차이로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었나 싶습니다. 차라리 아쉬움이 남지 않을 정도로 처참하게 지면 더 좋았을걸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반면 1점 차이로 최저등급을 맞추거나 3수를 한 컴퓨터 활용능력 시험에 합격한다면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내가 그때 마지막으로 본 게 시험에 나왔어', '내가 정말 많이 고민하다 찍었는데 맞았어' 등 과거의 나 자신이 너무 고맙고 대견스럽습니다. 신기합니다. 시험에 붙고 떨어지고를 결정하는 단 1점 차이로 과거 자신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똑같은 나였는데 1점으로 인해 쓰레기에서 노력의 천재로, 구제불능에서 될놈될로 바뀝니다.


뭐 딱히 생각해 보면 그리 신기한 건 아닙니다. 결과가 달라졌기 때문이죠. 결과가 정반대이기 때문에 과정이 이랬든 저랬든 결과에 따라 나 자신을 평가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항상 그래왔습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한들 결국 나를 정의하는 건 200명이서 한 치의 양보 없이 조각조각 나눠가진 내신등급과 칼같이 매겨진 수능 점수였기 때문입니다. 학창 시절 어른들이 하루 10시간씩 공부해도 성적이 그대로인 우리들에게 과정이 중요하다 백날 위로해도 정작 결과가 나오지 않는 고통의 과정을 밟고 있는 우리들은 그 말이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무책임하기까지 들렸던 그 말은 결과 앞에서 아무런 의미도 갖고 있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때 했던 말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서서히 알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단순히 노력을 통해 얻어낸 결과가 자신을 정의하는 게 아닌 과정 속에서 나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의 소중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린 너무 결과에 목 매여서 살고 있었던 거 같습니다. 대학과 회사라는 결과에 나를 빗대어 소개하는 것이 일상화되었고 결과로만 나 자신을 평가하니 저도 그리고 당신도 꽤 많이 불행해졌습니다.


어렵겠지만 조금씩이라도 순간의 자신을 기억합시다. 내가 그 순간을 얼마나 밀도 있고 최선을 다해 살아냈는지, 내가 그 순간의 과정을 얼마나 즐겼는지 그 장면을 기억해 보는 겁니다. 비록 경쟁에서 졌어도 조금의 용기를 내어 그 경쟁의 과정을 멋있고 남부끄럽지 않게 달려온 나에게 잘했다는 미소를 지어줍시다. 귀에 에어팟을 끼고 잔돈을 던지는 진상 손님들에게도 웃으며 계산을 해주는 당신인데 자신에게 응원의 미소를 지어준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날 만큼 결과에 가려 자신을 잃어버리진 않았나요? 결과는 쉽게 사라질 수 있어도 당신의 그 순간은 천천히 당신의 의미가 되기에 끝까지 결승선을 향해 달려온 나에게 활짝 웃어줍시다. 결과가 주는 합격 통지서 한 장은 잠시 잊어두고 그 순간의 나를 바라봅시다. 어느 누가 봐도 충분히 멋있습니다.


당신의 모든 순간에 당신이 있어 마지막엔 항상 웃을 줄 아는 사람이 되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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