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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균 Mar 20. 2023

찌질의 역사

화가 나는 당신에게

화. 필요하지만 짜증 나는 감정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평소 재미있게 치던 장난도 갑자기 짜증이 나고 아무 감정 없었던 옆 직장동료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리고 심기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잠깐만 더 깊이 들어가 봅시다. 정말 아무 이유가 없었나요? 정말로요? 아마 아닐 겁니다. 소중하게 갖고 다니던 에어팟을 급하게 나오느라 집에 두고 왔거나, 직장 상사한테 별 시답잖은 일로 한소리를 들었거나 아니면 버거킹 쿠폰함에 내가 먹고 싶은 통새우 와퍼 할인 쿠폰만 없는 등 오늘 하루의 기분을 쭉 따라가다 보면 분명 마음속 장식용으로 있던 벽난로에 불을 붙인 방화범이 누구인지 만날 수 있습니다. 너무 작고 사소한 이유라 눈치 못 챘겠지만, 아마 당신이 하루 종일 기분이 안 좋았던 이유는 그 작고 사소한 이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통새우 와퍼 할인쿠폰이 없다고 짜증을 내면 나 자신이 너무 찌질해보이기 때문에 평소와 똑같이 내 방을 치우던 엄마, 장난을 치던 친구 아니면 아무 생각 없는 동생에게 가서 내가 그냥 기분이 안 좋다며 괜한 화풀이를 합니다.


저 역시 그런 적이 많습니다. 3년 전쯤이었을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6살 사촌 동생이 실수로 제가 아끼던 기타에 손톱만 한 기스를 냈을 때 속으로는 열불을 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친척들이 보는 앞에서 화를 낼 수는 없었기에 입모양만 웃으면서 아기를 방 밖으로 내보내고 애꿎은 엄마한테 왜 주말에 시끄럽게 친척들을 불러서 쉬지도 못하게 하냐고 뭐라 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친척들이 오건 말건 아무 상관 없었지만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기스 때문에 화를 내는 제 모습이 부끄럽고 찌질했기 때문에 다른 이유를 붙여야만 했습니다.


지금은 기타에 흥미가 떨어져서 어디에 흠집이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그때의 제 기타는 꽤 소중했습니다. 극강의 가성비만을 추구하며 악기란 오천 원짜리 리코더만 샀던 제가, 알바비를 꼬박꼬박 모아 30만 원을 들고 종로 한구석에 투박한 간판이 매력적인 낙원상가까지 가 1층과 2층을 오르락 내리며 아저씨와 긴 흥정 끝에 35만 원짜리 기타를 현금으로 30만 원에 얻어낸 기타였습니다. 아마 그때 제가 가지고 있던 물건들 중 가장 비싼 물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기타를 받자마자 너무 신나버린 저는 낙원상가 화장실 옆 의자에 쪼그려 앉아 이제야 소리가 나기 시작한 F 코드를 잡으며 즐거워했고 M 버스를 타고 집에 갈 때도 혹시나 기타가 쓰러지진 않을까 불안해 텅텅 빈 옆자리를 내버려 두고 다리 사이로 꼭 안고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30만 원짜리 기타가 뭐 어디 특별하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5만 원 더 싸게 샀다고 좋아했던 기타는 사실 인터넷 최저가가 30만 원인 기타였습니다. 몰랐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냥 호구 잡지 않고 정가에 팔아준 아저씨에겐 감사하고 있습니다. 100만 원도 아니고 30만 원짜리인데다 기타가 부서진 것도 아니고 정말 작게 손톱만큼이나 살짝 기스가 난 걸 가지고 그 자리에서 바락바락 화를 냈다면 너무 찌질했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그 찌질함을 감추고 싶어 더 찌질한 방식으로 화를 냈다는 겁니다. 아무 맥락과 이유 없이 어떻게든 '내가 지금 기분이 안 좋다'를 표현하고 싶어서 만만한 누구에게 괜히 투정 부리고, 꽁해 있고 그런 모습을 자주 보인 거죠. 지금 생각해 보니까 이게 더 찌질합니다. 이제 저는 제 감정과 생각들을 잘 정리해서 풀어내는 진정한 어른이 되었기에 이런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전 찌질의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봅니다.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사람에게 너무 찌질해 보일까 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제가 건덕지 하나를 발견해 이때다 싶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가며 불필요한 감정들을 내뱉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또 후회합니다. 한 발자국만 뒤로 물러나서 바라보면 충분히 멋있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을 상황에 급급해 나 자신을 숨기고 상대방을 질타합니다. 마무리는 어영부영 사과로 끝나긴 하지만 이미 한 입 베어물은 탓인지 사과를 건네는 자신도, 상대방도 영 찝찝합니다.  


그때그때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만, 쉽진 않습니다. 적당한 사회생활, 원만한 인간관계, 나쁘지 않은 평판을 얻기 위해 또는 찌질해보이지 않기 위해 화를 참지만 이상한 순간에서 터져버립니다. 주위에 당신의 모든 감정을 받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 없다면 나 자신이 뭉쳐진 찌질의 감정을 온전히 받아내겠죠. 뭐가 됐든 몸에 안 좋을 거 같습니다.


20년간 살면서 느낀 건데, 전 애초에 상남자라는 컨셉과 거리가 먼 거 같습니다. 기스 하나에도 쩔쩔매는 제가 이러한 모습을 감추고 대인배인척 살아가기란 상당히 힘들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그냥 찌질해보이더라도 그때그때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땐 그게 훨씬 저의 이미지에 도움이 될 거란 제 귀납적 추론입니다. 작고 사소한 이유라도 저를 불편하게 만드는 감정들을 모아 모아 엉뚱한 곳에 터뜨리지 말고 그 순간 나만 들리게 조곤조곤 말하면서 조금씩 찌질함을 표출하면 어느 누구도 제가 찌질하다고 눈치 못 챌 거 같기에 아무도 안 볼 때 몰래 툭 툭 발에 걸리는 돌멩이에게 투정을 부릴 예정입니다. 혹시라도 제가 별것도 아닌 이유로 툴툴거리는 걸 보신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제가 멋진 이미지를 쌓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아니면 같이 툴툴거려도 좋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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