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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균 Mar 20. 2023

그들은 왜 노래방 기계를 사는가

슈프림을 좋아하는 당신에게

슈프림. 빨간색 박스에 단순한 볼드 이탤릭체가 매력적인 브랜드입니다. 저의 첫 슈프림은 아웃렛 매장에서 폭풍 세일을 하고 있는 3만 원짜리 슈프림 후드 티였습니다. 솔직해지자면, 그때는 슈프림이라는 브랜드가 뭔지도 몰랐고 흔히 길거리에서 보이는 갭, 토미 힐피거 같이 그냥저냥 유명한 브랜드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매장이 없는 것조차 몰랐으니까요. 아버지 출장을 같이 가겠다고 떼 써 쫄래쫄래 따라간 갑작스러운 미국 여행을 가기 전까지만 해도 이 브랜드에 대한 관심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냥 신발에 조금 관심이 있어 뒤적거리다 가끔 슈프림 로고가 붙어져 있는 신발들은 리셀가가 몇 배로 뛰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다 미쳤구나 생각을 했던, 그런 브랜드였습니다.


면허가 있지만 운전면허시험 이후 3년간 핸들을 잡아본 적이 없어 렌트를 할 수 없었던 저는 어쩔 수 없이 LA에서 꼬박 7일을 머물러야 했기에 상당히 여유로운 여행 일정을 짤 수 있었습니다. 평소 패션이나 브랜드는 그렇게 큰 관심은 없었고 개인적으로 여행을 가면 자연경관을 보는 것과 먹는 것을 좋아했기에 쇼핑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시간이 널널하기도 했고 뭔가 매장에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제가 스트릿 문화에 조예가 깊고 쿨한 사람이 된 거 같아 그날 하루만큼은 닥터 드레 노래의 볼륨을 최대로 키워놓고 힙스터 흉내를 내며 매장에 방문해 보았습니다.


이것저것 알아보니 이 브랜드는 매주 목요일마다 새로운 상품들을 발매하더군요. 이걸 '드롭'이라 칭하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옷이라곤 강남역 지오다노나 가끔 아웃렛에서 세일하는 옷들을 뒤져 샀던 저로선 상당히 재밌었습니다. 신기했던 점은, 단순 옷이나 신발뿐만 아니라 액세서리도 매주 새롭게 나오고 있었습니다. 제가 방문했던 날에 새롭게 드롭됐던 액세서리는 노래방 기계였는데, 빨간색 앰프에 마이크가 연결된, 노래방도 없는 미국에서 저걸 어디에 쓸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액세서리였습니다. 혹시 구입하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250달러 정도 했던 거 같은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기분 좋게 캘리포니아의 햇살을 받으며 수많은 노숙자들과 대마 연기를 뚫고 지하철과 버스를 오가며 매장에 도착을 했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새로운 상품이 드롭되는 목요일은 그 주 월요일에 미리 사인업이라는 일종의 매장을 방문하겠다는 예약을 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몰랐던 저는 같이 서있던 팬티로고가 살짝 보이게끔 바지를 내려 입은 흑인 신사분들과 오늘 날씨가 참 좋지 않냐며 자연스레 스몰 톡을 하며 매장에 들어가려 했지만 100kg는 나가 보이는 가드한테 막혀 사인업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매장에 들어갈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 주 드롭 물품들이 인기가 별로 없어서인지 한 시간 반 정도 대기를 해 매장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손님이 왕인 한국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여긴 미국이지 않습니까. 이해해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놀라웠던 건,  그 한 시간 반 동안 모든 노래방 기계가 다 팔렸다는 것입니다. 앞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양손에 쇼핑백을 4개씩 들고 뒤뚱거리며 나간 것도 모자랐던지, 황토색 박스에 포장된 자기 몸통만 한 노래방 기계를 차에 싣고 가지고 가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이 브랜드가 무엇을 의미하기에 매주 사람들이 이렇게 예약까지 하며 물건을 사고, 피팅룸에서 옷을 입어보지도 않은 채 몇십 아니 몇백만 원을 5분 만에 쓰며 평생 한번 쓸까 말까 한 노래방 기계를 사는지, 도대체 이 브랜드가 저들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다른 명품 매장들의 오픈런 소식은 간간이 전해 들어 익숙했지만 슈프림의 인기가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제가 매장에 들어가고 난 후에는 이미 인기 있는 상품들은 다 팔리고 이상한 프린팅이 박혀있는 티셔츠가 전부더라고요. 티셔츠 한 장에 3만 원도 고민하며 사는 저로선 40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5만 원 정도 하는 티셔츠 한 장 사는데도 큰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아직 슈프림이란 브랜드를 제대로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진 몰라도 해골 그림과 이상한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는 티셔츠를 사기엔 좀 망설여졌기에, 빨간 로고가 작게 박혀있는 티셔츠와 그나마 조금은 익숙한 신발 한 켤레를 샀습니다. 이상한 건, 보드란 초등학교 시절 S-보드만 탔던 제가 단지 슈프림 옷 몇 개를 샀다고 괜히 나도 헤드폰을 낀 채 배기팬츠를 입고 도로에서 수많은 운전자들의 화를 돋우며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다니는, 경비를 피해 지하철 계단에서 묘기를 부리다 어디 한군데 부러져도 신경도 안 쓰는 스케이트 보더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이게 브랜드의 힘인 걸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마저 힙스터로 만들어 버리는 슈프림에 저도 모르게 젖어들고 있었습니다.


이 문화에 살짝 발만 담갔는데도 아까는 쓰잘데기 없어 보였던 노래방 기계가 갑자기 갖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니 평소에 슈프림 옷을 입고 다니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오죽할까요. 수량만 남아있고 가격이 조금만 더 착했더라면 아버지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더라도 비행기 안에 들고 탔을 거 같습니다. 이제서야 사람들이 왜 아침 10시부터 매장 앞에 줄을 서고 있었는지 이해가 됩니다.


참 신기하지 않나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냥 길거리에서 보이면 무시하고 넘어갔던 옷과 신발들인데 브랜드의 역사와 문화와 그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 갑자기 슈프림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괜히 멋져 보이고 스케이트보드를 타본 적도 없는 제가 동질감을 느낍니다. 단지 이 제품을 사는 것만으로 슈프림이라는 브랜드가 다져놓은 반항아 정신과 스트릿 문화를 제가 그대로 이어받은 느낌입니다. 명품을 사본 적도 없고 사는 사람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떤 느낌으로 수백만 원짜리 가방과 옷을 사는지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제가 느꼈던 것처럼 소비하는 행위만으로도 그 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렇게 생각하니 5만 원짜리 티셔츠의 가성비가 참 괜찮아 보이네요. 이 느낌을 잊기 전에 얼른 당근에서 스케이트보드부터 구매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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