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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균 Mar 20. 2023

분리수거는 잘 하시죠?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당신에게

분리수거. 어렸을 때부터 매주 수요일 저녁 9시만 되면 잠옷 차림으로 아버지가 마셨던 맥주 캔과 각종 생수 병들을 버려서인지 매우 익숙합니다. 다 먹은 음료수 병을 버릴 때도 라벨을 떼지 않으면 뭔가 굉장히 찜찜한 느낌이 들죠. 이제는 카페에서 음료를 마실 때 플라스틱 컵을 주는 것도 불법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마 당신이 대한민국에서 쭉 살아왔다면 분리수거를 통해 지구를 지키자는 얘기는 뇌 속 어딘가에 깊이 각인되었을 겁니다. 특히 대한민국 입시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분야를 막론하고 당신이 환경에 매우 민감한 융합형 인재인 걸 보여야 했기에 경영이면 ESG, 경제면 탄소배출권, 국제기구면 지속가능성 등 다양하게 알아봤겠죠. 당신이 정말로 환경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죄송합니다. 뭣도 모르고 있어 보여 생기부 여기저기에 ESG 경영을 억지로 끼워놓은 제 이야기이니 그냥 넘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환경에 그렇게 관심 없던 저도 분리수거는 꽤 잘했습니다. 생수병 라벨을 떼기 귀찮아 그냥 버릴 때도 있지만 플라스틱 쓰레기를 버리다 유리병이 잘못 들어가면 끈적거리는 쓰레기통을 만지면서까지 재활용을 했었거든요. 텀블러를 들고 다니며 테이크 아웃을 해 갈 정돈 아니었지만 그래도 재활용을 하면서 해는 끼치지 않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던 선량한 시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요 며칠간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도대체 이게 뭔 소용인가 회의감이 들었던 경험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아 혼자 호텔에서 자는 건 꿈도 못 꿨던 저는 노숙자들과 마약에 반쯤 찌든 사람들이 즐비하는 지하철을 타고 공항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1박에 55달러였던 게스트 하우스가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잘 때 조금 시끄럽긴 했지만 저녁마다 자기가 사 온 음식을 거실에 들고 모여앉아 각자 여행 이야기를 풀어주는 재미가 있던 곳이었거든요. 첫째 날 저녁을 먹고 남은 음식물과 플라스틱 용기를 버리려고 했는데 웬걸, 음식물 쓰레기와 모든 쓰레기를 그냥 같이 버리랍니다. 음식물이 묻어 있으면 씻어서 분리수거하는 한국에서 일부로 음식물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제 20년간 분리수거 인생이 용납할 수 없었지만 여긴 미국이지 않습니까. 이해해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분리수거는 무슨 음식물도 같이 버리는 이 생활이 익숙하진 않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던가요. 다음날부터 얼음과 과일 시럽이 잔뜩 남아있는 플라스틱 컵을 아무 생각 없이 길가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리는 제 모습에 익숙해졌습니다. 온갖 음식물과 플라스틱이 넘쳐흐르는 초록색 쓰레기통을 볼 때면 한국에서 아무리 분리수거를 열심히 해봤자 우리나라보다 거의 100배는 큰 미국에선 이러고 있으니 회의감이 들더군요.


솔직히 말하자면 환경 중요하다, 기후변화 심각하다 항상 들으며 자라왔지만 마음 한구석엔 그래서 어쩌라고 식의 생각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분리수거를 하긴 했지만 이건 20년간 거의 세뇌에 가까운 공립 교육과정의 결과였고 플라스틱 빨대를 종이 빨대로 바꾼다 한들 음료를 다 마시고 빨대를 질겅거리는 제 습관은 바꿀 수 있을지언정 정말 환경에 도움이 될까라는 의문증은 항상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사소한 것 하나부터 바꿔나가야겠지만, 범세계적 기업과 국가가 협업해도 문제 해결이 어려운 판국에 너무 개인의 행동 하나하나에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이 100살까지 산다고 했을 때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플라스틱을 하나도 안 쓰고 집 앞 텃밭에서 자라난 식물들만 먹으며 100%의 탄소 배출 절감을 이뤄낸다 해도 중동 어딘가에서 석유를 캐고 있는 회사가 1초만 기계를 더 돌리면 당신의 80년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약간은 허망하게 들리는 소리죠.


분리수거조차 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단지 지금 일어나고 있는 기후 위기가 절대 개인의 생활양식만 바꾼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고기를 먹는다고, 에어컨을 1도 더 낮게 튼다고, 샤워를 오래 한다고 환경오염의 주범이다 질타하는 사회가 아니라 서로의 생활양식을 존중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새로운 환경 기술을 개발한 회사의 주식을 조금이나마 구매해 보고, 실질적으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정치인에게 투표하는 등 문제 해결의 실질적 주체들에게도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여유가 되신다면 전기차를 이용해 보시거나 버려진 방수 천으로 만들었다는 프라이탁 파우치를 사보는 것도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산업계에 환경친화적인 시그널을 보내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혹시라도 이 글을 읽으시고 들고 다니던 텀블러 컵을 버리신다거나, 힘들게 유지하던 채식을 때려치우는 일은 없길 바랍니다. 당신의 친환경적인 생활양식은 지구 전체를 놓고 봤을 땐 미미하지만 환경을 위하는 일이라곤 분리수거밖에 안 하는 저 같은 사람에게 언제라도 당신을 닮고 싶다는 욕구를 만드니까요.


그래도 프라이탁은 너무 비싸지 않나요?


https://youtu.be/yiw6_JakZFc

(시간이 되신다면 자막을 키고 1.25배속으로 영상을 한번 보시길 추천합니다. 찾아보시면 한국어 더빙판도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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