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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균 Mar 25. 2023

장르는 힙합으로

힙합을 좋아하는 당신에게

힙합.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4학년이었나요, 학교 영어 선생님이 그 당시 최고의 히트곡이었던 저스틴 비버의 'Baby'를 매 수업 시작마다 들려주셨는데 저는 비버보단 중간에 빡빡머리 선글라스 아저씨가 불라 불라 대는 소리에 매료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거실에 있는 컴퓨터로 어떻게든 이 아저씨를 따라 하고 싶어 네이버에 '저스틴 비버 baby 한국어 발음'을 검색해 하루 종일 1분 남짓의 래핑을 연습했고, 이후 당연히 에미넴, 닥터드레, 위즈 칼리파부터 스윙스, 도끼, 이센스까지 다양하게 네이버 지식인을 타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 게 여기까지 왔네요.

노래를 잘 못하는 저에게 힙합은 음악으로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였고 이후에는 이 문화의 자유로움이 주는 깊은 바다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사실 4대 기독교 집안에 일요일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를 갔던 저에게 힙합에서 주로 얘기하는 돈, 마약, 여자 같은 주제는 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너무나 잘 압니다. 아마 그래서 더 빠져들었나 봅니다. 내가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며 툭하면 멀쩡히 살아계시는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그 발칙함에 매료되어 마음 한구석에 있는 욕구들을 힙합 노래를 들으며 채웠습니다.

아, 그래서 갑자기 힙합 얘기를 왜 하냐고요? 근 몇 년간 힙합에 관심이 떨어졌다 오늘 나온 AP Alchemy의 컴필레이션 앨범을 듣고 옛날의 향수가 떠올라 급히 컴퓨터를 켠 것입니다. 잠깐의 배경 설명을 해드리자면, AP Alchemy는 스윙스가 만든 새로운 힙합 그룹이고 거기서 단체곡 형식의 앨범을 냈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아마 국내 힙합에 조금 관심 있으셨던 분들은 알겠지만 한창 페이스북에 콕 찌르기가 유행했던 2010년대는 국내 힙합의 전성기였습니다. 문제아들 집단 JM과 머니 스웩의 시초 일리네어, 이들이 한국인이라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코홀트까지. 그리고 저 같은 수많은 힙찔이를 양산한 쇼미더머니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힙합에 관심 없던 분들도 이때쯤 나온 바비의 '연결고리#힙합'은 들어보셨겠지요.

둔탁한 드럼 비트와 선을 넘는 가사들로 이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얘기하고 있을 때, 독서실에 처박혀 가만히 고개를 흔드는 게 전부였던 저는 32gb의 아이팟으로 이들의 문화를 향유하고자 했습니다.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 저 역시 17살에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상반신에 문신을 가득 뒤덮은 채 어두컴컴한 클럽 안에서 담배를 맘껏 피워대는 래퍼인 거 같았지만, 실제론 자퇴는커녕 실수로 시험에서 한문제만 틀려도 하루 종일 우울한 표정을 하고 지냈던 어린 소년에게 그 당시 힙합은 일종의 도피처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이들의 노래를 찾아듣기보단 간간이 유튜브 알고리즘에 뜨면 빨간색 동그라미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뒤죽박죽 듣다 그냥 기억에서 잊어버리게 되는, 그런 시간들이 몇 년 정도 지속되었습니다. 죽어간다. 이 표현이 적합했겠네요. 악동뮤지션의 보컬 오빠가 말한 대로 어느새부턴가 힙합은 안 멋졌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거침없이 얘기하기보단 남들 눈치나 보기 급급하면서 차트인을 했냐 안 했냐에 집착하는, 자기들끼리 가족이라 부르면서 같이 피시방 몇 번 다니고 뒷골목에서 담배나 몰래 피는 아이들이 실제 가족에게는 100만 원짜리 패딩을 사달라고 조르는, 누가 봐도 가짜 멋을 흉내 내고 있다는 게 뻔히 보였던 리스너들은 자연스레 옛날의 그 시절과 비교하며 새로운 노래를 듣고 새로운 아티스트에 열광하기보단 과거의 향수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스윙스가 자신 있게 내놓은 [AP Alchemy : Side A]의 앨범은 특별한 거 같습니다. 과거 힙합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인물들과 새로운 아티스트들이 적절히 버무려져 그 당시 우리들이 느꼈던 발칙함은 물론, 선을 넘을 듯 말 듯 한 아슬아슬함이 아닌 아예 선을 넘는 가사들로 듣는 것만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드는 쾌감, 그리고 트렌드에 맞는 편안한 보컬이 메인인 R&B 곡까지. 오랜 힙합 팬들과 어쩌다 알고리즘의 선택에 이끌린 일반 대중들까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좋은 앨범이 오래간만에 나온 거 같습니다. 완벽하겐 아니지만 그 시절 힙합을 좋아했던 이유를 다시 생각나게 해준, 뭐랄까 초등학생 때 친했던 동네 친구를 우연히 대학에서 만난 느낌이더라고요.

힙합을 왜 좋아하냐고요? 멋있어서요. 이번 앨범이 왜 좋냐고요? 멋있어서요. 발라드, 팝, 트로트 등 다른 장르와 달리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로 자리 잡힌 힙합을 듣는 이유는 그냥 멋있어서 듣는 겁니다. 목소리가 앵앵거리던, 발음이 안 좋던 상관없이 그걸 오히려 자신의 아이덴티티로 만들고 주위에서 아무리 뭐라 한들 자신만의 멋을 추구하기 때문에 힙합이고 힙합인 거죠. 왜 힙합을 좋아했었나 까먹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다시 생각났습니다. 옷도 못 입고 꾸밀 줄도 몰랐던 10대 소년에게 멋을 추구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힙합이어서 그랬네요. 혹시 당신, 요즘 부쩍 자신감이 떨어지고 기분도 꿀꿀하다고요? 날씨도 좋은데 나가서 산책도 하고 노래도 듣고 하는 건 어때요? 아 물론,

장르는 힙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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