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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균 Aug 02. 2023

이렇게 늙고 싶다

60이여도 청춘인 당신에게

(오른쪽부터) 주진모 배우, 황건 배우, 안병식 배우. 셋 모두 연극, 뮤지컬계에서 잔뼈가 굵으신 분들이다.

우연히 좋은 기회를 얻어 학교에서 발간하는 교우회보의 학생기자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등록금 지원이란 다섯 글자에 눈이 먼 탐욕스러운 기자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정확하고요, 혹시라도 길거리 인터뷰에서 학생기자 왜 하냐고 질문 받았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다른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커뮤니티의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전공과에 집중하다 보니 인적 네트워크의 80%가 여의도 증권사와 CPA로 한정됨에 목마름을 느끼고 있었고, 교우회보 특성상 학교생활에 중심을 두기보다 졸업 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시는 교우분들을 다룬다는 점이 꽤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4일 전 얼레 발레 첫 취재를 나갔는데요, 고대극예술연구회에서 76학번부터 07학번의 선후배들이 다 같이 모여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을 선보인다길래 노트북과 카메라를 챙겨들고 연습실로 향했습니다. 솔직해지자면 그냥 동아리 했던 사람들이 심심해서 연극 하나 준비하나 보다란 마음으로 갔었는데 들어가자마자 타짜에 나오는 짝귀가 있어서 놀랐습니다. 타짜를 5번 넘게 본 입장으로서 고니, 아귀 다음으로 짝귀가 인상적인 캐릭터로 남아있는데요, 위 사진에서 맨 오른쪽에 앉아계신 신사분이 짝귀 역을 맡으신 배우 주진모 씨입니다. 알고 보니 저희 학교 출신으로 학창 시절 때부터 극활동을 활발히 하셨더라고요. 이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녹음기를 켜 2시간가량 취재를 시작했습니다. 


생각보다 저희 학교 출신 연극배우분들이 꽤 계시더라고요. 벌써 20년 차 극 배우도 계셨고 연출, 대본, 기획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현역으로 활동하고 계신 분이 많아 제가 생각했던 동아리 수준의 공연이 아니었습니다. 거진 2달 동안 5시부터 10시까지 호흡을 맞추고 연습할 때도 스태프들까지 모여 조명, 소품, 연기 디렉팅 등 뭐 하나 허투루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잠깐 연습 과정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는데 뭔가에 이리 압도당하는 기분은 오랜만이었습니다. 유튜브 영상도 5분이 넘어가면 끄고 쇼츠를 찾아보는 제가 30분이 넘도록 가만히 앉아서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는 건 말 다 했죠. 혹시 요즘 도파민 중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면 혜화 대학로에서 아무 연극 하나를 골라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1080p가 주는 몰입감과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공연의 기획은 유대준 교우의 퇴직금 5000만 원 후원으로부터. 알고 보니 상갓집에서 오랜만에 만난 76학번 분들이 젊었을 때의 연극에 대한 열정을 다시금 불사르기 위해 기획한 공연이었습니다. 사실 연기도 연기지만 제일 놀랐던 건 유대준 교우의 열정이랄까요. 76학번이면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인데 졸업 이후 생계에 치여 극활동을 못했지만 은퇴한 지금부터라도 공연을 하고 싶다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정말로 멋있었습니다. 


사실 그렇잖아요. 60, 70 정도 나이를 먹으면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도 있고 주변 시선을 의식하기도 마련인데 연기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멋있는 역할이 아닌 넘어지고, 엎드리고, 밧줄을 칭칭 매달고 무시받는 역할을 기대감에 잔뜩 부푼 얼굴로 연습하는 모습 자체에서 멋이 흘러넘쳤습니다. 멋있게 나이가 들었다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겠죠.


솔직히 전 나이 드는 게 싫었습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슬슬 철 들어야지'하면서 소위 말해 욕 안 먹는 행동들, 튀지 않고 적당히 묻어가며 반항이라곤 교복 위 하버드 맨투맨을 입는 것뿐이었고 그나마 자유로운 대학 4년 이후에는 취업, 결혼 등 아침 출근에 짜증이 기본값으로 설정된 직장인들이 내 미래겠구나 하며 지하철을 타곤 했는데 요즘 들어, 그리고 이분들을 보며 진짜 멋있게 사는 게 뭔지 조금씩 알아가는 거 같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한마디가, 유대준 교우한테 몇 십 년 만에 무대에 오르게 된 소감이 어떤지 물어봤는데 인생 통틀어 지금이 제일 행복하답니다. 20대보다 지금이 더 뜨겁고 불타오르기에 나이는 육십이지만 순간은 청춘이다 라고 하셨는데 계속 뇌리에 남더라고요. 최근에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친구가 있었는데 수염만 하얗게 기른다면 이 할아버지처럼 멋있게 늙을 거 같습니다.


아무쪼록 짧은 2시간이었지만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신 극예술연구회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8월 18일부터 27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공연이 진행되는데 시간이 되신다면 꼭 보셨음 합니다. 오랜만에 무언가에 몰입되는 경험을 선사할 거라 자신합니다. 


늙어도 멋있게 늙자고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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