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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센척하는 겁쟁이 Nov 26. 2021

나를 지키지 못한 시간

내 생애 최고의 더위

  20여년이 지났어도 나에게 가장 화가 나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떠 올리면 아직도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온다. 


때는 바야흐로 2003년.

폭염기록으로 치자면 역대급은 아닐지 모르나 나름 나에게는 기록적인 폭염으로 다가왔던 해였다. 그 당시 나는 만삭 상태였기 때문에 보통 때보다 갑절로 더위를 느꼈다. 하필 오래된 다세대 주택에서 월세로 신혼생활을 시작한지라 에어컨이 있을 턱이 없다. 바람도 잘 통하지 않는 좁은 집에서 나는 여름을 겨우 겨우 견디고 있었다. 정말 못참겠을 때는 근처 영풍문고로 가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었지만 불편한 의자에서 몇 시간이나 버틸 수 있겠는가. 그저 한낮의 더위만이라도 피해보자는 마음이었겠지. 


남편의 휴가는 더위가 절정에 달한다는 8월초였다. 그 때만이라도 에어컨 나오는 펜션이든 호텔이든 어쨌거나 에어컨 없는 이 집을 떠나는게 소원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제안한 휴가지는 어디였을까? 두둥! 

에어컨이 있기는 있는 곳.


"시댁"


이쯤에서 많은 독자들의 욕이 튀어나왔으리라 짐작한다. 

맞다. 그곳으로 휴가를 떠나는 것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미친 짓이라걸 알았다. 게다가 그 시기에 시이모네 식구들이 시댁에 놀러 온단다. 그렇다, 정말 가면 안되는 곳이었다. 

나는 당연히 남편에게 휴가로 시댁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남편은 그곳에는 에어컨(안방에만)이 있어서 시원하게 지낼 수 있다며 나를 꼬셨지만 그래도 나의 마음을 돌리긴 쉽지 않았다.

그러자 수없는 실랑이 끝에 나중에는 나에게 화를 냈다. "그래! 넌 가지마. 나 혼자 갈테니까." 


결국 마음이 약해진 나는 눈물을 머금고 그에게 이끌려 비극이 충분히 예상되는 그 곳으로 가게되었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했다. 여자의 육감은 정확하다 했다. 

   

에어컨이 나오는 안방에는 시이모네 식구들과 남편과 시아버지가 하하 호호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담소를 나누고 나는 가스렌지 두개가 쉴새없이 열을 뿜어내는, 수증기 가득한 부엌에서 휴가를 보내게 되었다. 

밥은 왜 꼭 세끼를 먹어야 하나, 우리 시어머니는 왜 매끼마다 새 밥을 하시나, 그것도 압력솥으로. 

밥도 먹었는데 왜 안주상, 야식상을 차려야 하는가. 설거지 해놓기가 무섭게 냄비며 그릇들은 왜 다시 싱크대에 모이는가. 왜! 왜! 왜! 


9개의 입구멍에 들어갈 음식을 만들고 치우는 사람은 시어머니와 나 뿐이었다. 시이모님이야 시어머니의 초대로 오신 분이니 어머니는 힘들어도 기쁜 맘으로 하실지 모르지만, 나는? 나는 9월에 출산 예정인, 출산을 한달 남짓 남겨놓고 있는 만삭의 임산부였다. 


임산부여서 공주대접을 바란 적은 한번도 없었다. 임신했어도 버스타고 꿋꿋하게 출근했고 집안일을 했고 내게 맡겨진 일을 씩씩하게 했던 댓가가 이런걸까. 임신했어도 앓는 소리 안하고 씩씩하고 티내지 않는 사람. 


아무도 나에게 진심으로 쉬라고 말하지도 않았지만 쉴 수도 없었다. 에어컨이 있는 방에는 손님들이 계시고, 시어머니는 내가 없으면 혼자서 9인분의 식사 준비를 하실테니까. 더위를 피할 곳도, 피곤한 몸을 누일 곳도 없으려니와 그런 곳이 있다 하더라도 그게 가시방석 아니겠는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압박에 나는 부엌으로 내몰렸고 나를 지켜줄 사람이 하나 없는 곳에서 나는 사무치게 외로웠고 온몸에는 땀이, 가슴엔 냉기가 흘렀다.


그렇게 2박 3일 동안 더위와 수증기 속에서 식사준비를 하면서 나는 입맛을 잃었고 대신에 더위를 먹었다. 밤에는 엄마가 보고 싶어 울었다. 내 발로 고통 속으로 찾아든 나를 벌 주고 싶었다. 나의 고통을 모른 척 한 남편을 미워했다. 만삭의 배로 상을 차리는 나를 보고도 편안하게 밥을 받아 먹는 시집 식구들을 미워했다. 


시이모네 식구들은 돌아갔고, 더위는 잦아들었고 아이는 건강하게 출산하였지만 가슴에 흐르는 냉기는 멈출 길이 없었다. 20여년이 지났어도 그 때의 어리고 착해서 바보같았던 나에게 화가 난다. 나를 지키지 못해서 나를 미워하고 남편을 미워하고 시집 사람들을 미워했다. 

나는 그 때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남편, 나는 시댁에 가지 않겠어. 혼자 가려면 혼자 가."


이 한마디를 하지 못해서 나는 아흔아홉가지를 잘했고 한 가지를 잘못한 남편을 미워했고, 어차피 혼자였어도 손님치레를 잘 하셨을 시어머니를 미워했고, 내가 없어도 잘 놀고 가셨을 시이모를 미워했다. 나는 가지 않아도 될 곳에 내 발로 가선 옹졸한 마음 깊숙히 원망을 차곡차곡 쌓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 자신을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는 교훈을 뼛속 깊이 새긴 귀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 실수와 시행착오가 지금의 나를 단단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쩌면 그것은 배우고 넘어가야할 거친 관문이었을 수도 있다. 덕분에 지금에 나는 많이 단단해진 것 같다. 


어리고 착하고 바보같아서 거절을 두려워 했던 나는 4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나를 지키는 법을 하나씩 깨달았다. 

1. 나를 가장 소중히 대할 것

2. 싫은 것, 부당한 것을 거절할 것

3. 다른 사람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나를 희생하지 말 것

 

싱그러웠던 2~30대가 그립지 않은 까닭은 나도 나를 잘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이 어디까지인지 몰라 늘 휘둘렸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았다.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당당하게 거절할 수 있다. 나는 나만의 취향과 가치관을 스스로 존중한다. 그래서 나는 나이 들어가는 지금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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