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남편의 지인이 있다. 그분은 자수성가하셔서 큰 부를 이루신 분인데 일 년에 몇 번씩 만나 식사를 같이 해 오곤 했다. 지난겨울 그분이 삿포로에 있는 료칸을 가신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 부부가 부러워했더니 같이 부부동반 여행 가자는 제안을 해 오셨다. 물론 비용은 각자 부담.
그런데 워낙 부유하신 분이라 그런지 그곳 료칸의 1박 가격이 70만 원이 넘었다. 매우 매우 부담스러운 가격이지만 남편이 즉흥적으로 "오케이!"를 외쳐서 말릴 틈도 없이 약속이 되었다. 그것도 무려 3박이나......(눈물이 ㅠ.ㅠ) 우리 분수에 맞지 않는 럭셔리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20만 원이 넘는 호텔을 가 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
어찌 됐든 3월의 삿포로 여행 자체는 만족스러웠다. 비싼 만큼 비싼 값을 충분히 하는 료칸과 노천탕, 코스로 나오는 가이세키 정찬, 직원들은 무릎까지 꿇고 왕처럼 떠 받들어 주는데 황송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태어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
부자인 분들과 여행을 하니 뭐든지 다 고급이었다. 그분들 따라 밖에서 먹는 식사, 쇼핑하는 것, 이동 수단도 다 제일 좋은 것들로 했지만 나는 가격을 보고 간이 졸아들고 머릿속으로는 계산기를 계속 두들기게 되는건 어쩔 수 없었다. 이것저것 추천해 주시는 것을 매번 안 살 수도 없어서 넉넉히 가져갔던 엔화도 다 쓰고 모자라 카드까지 긁게 되었다.
지금도 돈 쓴 걸 생각하면 속이 쓰리지만 이번 여행 파트너들을 관찰하며 발견한 사실들이 흥미로워서 글로 남겨 보고 싶었다. 부자들의 돈 쓰는 방식, 우선순위가 평소에 내가 생각하던 것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부자들은 단골손님이다.
이 분들은 늘 가는 곳만 가고, 먹는 것만 먹었다.
이 료칸도 15년째 다니는 곳이라 했다. 그것도 일 년에 몇 차례씩을 오니 주인뿐만 아니라 직원들도 다 알아보고 이름까지 기억할 정도였다. 서로 자녀들의 결혼식까지 챙겨주고 한국에 오면 식사 대접도 하는 거의 친구 사이였다.
이 분들은 식당도 항상 가는 곳만 간다. 주인이 자신을 알아봐 주고 자신도 주인을 챙겨 주며 긴밀한 사이를 유지한다. 얼마나 친한지 식재료를 들고 가면 식당에서 요리를 해 줄 정도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저 자주 찾아가는 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팁 인심도 후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 분이 알려주신 요령은 어떤 호텔이든 들어가는 첫날 벨보이에게 팁을 두둑하게 준다고 했다. 그러면 매일 벨보이가 인사를 하며 특별히 대해 준다고 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긍정적으로 각인시키는 방법은 역시 돈이 최고인 듯하다. 이 분은 자신이 특별한 손님이 되기 위하여 기꺼이 돈을 쓰셨다.
두 번째, 비싸도 품질이 좋은 것을 산다.
나 같은 사람은 쇼핑을 할 때 가성비를 철저히 따져서 산다. 그런데 부자들은 쇼핑할 때 가격보다는 품질이 확실한 것을 찾았다.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어떤 물건이나 음식이 좋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충성스러운 고객이 된다. 이번 삿포로 쇼핑에서도 본인들이 늘 사던 품목들만 사고 새로운 것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심지어 일본의 특정 브랜드 쌀을 십수 년째 사다 먹는다고 했다. 덕분에 이 분들이 추천한 제품의 품질만큼은 확실했다. 수십 년간 경험해 보고 시행착오를 거쳐 엄선한 것들이니 그럴 수밖에.
한국에서도 회를 사는 곳이 정해져 있고, 고기, 빵을 사는 것도 검증된 가게만 가니 주인들 입장에서도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손님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 분들에게 가장 안타까운 상황은 오래된 단골집이 폐업하는 경우라고 했다. 이들이 문을 닫으면 또다시 시행착오를 거치고 새로운 곳을 탐색해야 하니 말이다.
세 번째, 건강을 각별히 생각한다.
노년기에 접어드셨음에도 식사도 왕성하게 하시고 술도 꽤 잘 드시는데 배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날씬한 몸을 유지하는 게 신기해서 여쭤봤더니, 여행 왔을 때 마음껏 먹기 위해 평소에는 하루 3시간씩 운동을 하고 소식과 채소 위주의 식사를 하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먹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평소에 건강 관리에 매우 신경을 많이 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분들 삶의 목표는 오래도록 건강하게, 부유함을 바탕으로 즐거움을 최대한 많이 누리는 것이다. 생이 모자랄지언정 돈이 모자랄 일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네 번째, 명품보다는 멋과 편의
이 분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부유했고 세상의 좋은 것은 다 가져보고 다 해보았으니 물건 자체에 대한 욕심은 없어 보였다. 옷이나 장신구도 좋은 것이 있지만 과시를 위한 용도는 아니었다. 젊은 부자들이 로고가 크게 박혀 있는 아이템들을 하고 다닌다면, 이 분들은 맞춤 셔츠를 입지만 명품 셔츠를 사진 않았고 자신에게 잘 어울리고 질이 좋은 것들을 하고 다녔다. 비싼 차를 살 순 있지만 운전하는 것은 스트레스니 주로 단골 예약 택시를 이용했고, 되도록이면 비행기도 비즈니스를 타서 몸을 편하게 하는 것에 돈을 썼다. 특별히 겸손하거나 검소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를 과시하거나 떠벌리지도 않았다. 고급 료칸에서 묵는 게 너무 자랑하고 싶어 요란스레 사진을 찍는 건 나 밖에 없었다.
다섯 번째, 시간 효율을 중요시한다.
아마 우리 부부만 여행을 갔었다면 되도록 버스나 셔틀을 이용하고 거리의 효율성을 고려해서 동선을 짰을 것 같다. 하지만 이 부자인 분들과 여행을 하니 주로 택시와 기차를 타게 되었다. 일본의 교통비가 워낙 비싸서 어디 한번 외출하고 오면 교통비가 10만 원씩은 드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분들에게 우선순위는 체력과 시간이지 돈은 아니었다. 이러한 모습은 특히 돈을 잘 버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것 같다.
1시간 동안 버스 타기(1,500원) vs 15분 택시 타기(15,000원) 어떤 걸 택할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가 맞다고 생각할 텐데 시간당 돈을 10만 원 이상 버는 사람들은 당연히 후자가 가성비 높다는 생각을 한다.
아직 나는 그 정도의 수입을 버는 사람은 아니어서 그런지 대부분의 상황에서 전자 쪽으로 기울어지긴 한다.
이렇게 3박 4일 동안 부자들과 여행을 하다 보니 돈이 후덜덜하게 많이 들었지만 부자들의 관점을 엿볼 수 있었다. 물론 다음에 같이 여행 가자 하셔도 거절하고 다시 우리만의 가성비 여행으로 돌아 갈 생각이다. 뱁새가 황새 쫓아가다가 가랑이가 찢어질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