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짜리 왕고

21.04. 우당탕탕 응급실!

by 안녕


버티기 힘들다고 소문났던 아니, 아직도 소문이 남아있는 이 병원에 근무한 지 벌써 1년이 되어간다.



막내는 퇴근하면 과제하느라 한 시간 정도 겨우 자고 출근을 하면 텔을 들고 일반구역부터 D&E구역, 격리실, 음압실, 초진을 뛰어다닌다.

하루 종일 뛰어다녀도 인계를 할 때까지 퇴근할 수 없었던 막내시절을 보내고 3개월 차가 되었을 무렵, 나는 중간도 거치지 않고 왕고가 되었다.



우리 병원 응급구조사는 왕고, 중간, 막내 이렇게 세명 정도가 한 듀티 근무를 하는데 각자의 역할이 있다.

막내는 구역을 배정받은 환자에게 오더 난 f/u lab&EKG나 다른 술기들을 하고,

왕고쌤은 초진 환자의 IV와 기본 lab&EKG 및 필요한 술기들과 119 환자 차팅을 한다.

중간쌤은 왕 고일을 배우며 막내나 왕고의 일을 도와준다.




지금까지 채혈한 피만 해도 남강만큼은 되지 않을까..




그렇게 3개월 차가 되고, 나도 후임들을 받게 되었고 그렇게 중간도 거치지 않고 왕고가 되었다.

보통 환자 내원 수가 적은 나이트부터 왕고를 세우기 때문에 왕고가 뭐가 대수냐고 하겠지만,

우리 병원은 다른 술기 외에도 month정도의 영아부터 both arm save로 다리에 라인을 잡아야 하는 투석환자들까지의 모든 IV는 다 왕고 몫이다.



심지어 나도 3개월 차인데 같이 근무하게 된 후임쌤은 입사 15일밖에 되지 않은 신규쌤이었다.

CPR환자가 오면 가슴압박부터 리듬분석, 라인과 랩을 초짜 둘이서 해낼 수 있을까 온갖 걱정이 가득했다.



역시나 출근부터 fever로 내원한 6 month 아가들이 3명이나 있었다.

아가들 보호자들은 예민해서 딱 봐도 경력자처럼 보이는 나이 지긋한 전담팀이 아닌 20대인 내가 들어오니 불신의 눈빛으로 쳐다보고 따지기 시작했다.

속은 당장이라도 토가 올라올 것 같지만 꾹 참고 여기서 내가 제일 잘하고 저밖에 할 사람이 없으니 부모님께서 믿으시지 않아 생기는 불안함은 제가 컨트롤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설명하고 진행했다.



정말 감사하게도 3명 아가 모두 한 번에 성공하였다.

이 날의 짜릿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세상 모든 것들에 감사했다.

선임쌤들한테 욕먹으며 배웠던 하루하루들이 정말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애기를 끝내고도 STEMI, CPR 등 정말 중증환자만 골고루 받았지만 막상 환자를 받으니 아무 생각 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



KakaoTalk_20210601_160517725_11.jpg 웃음이 계속 나왔다:)




지금은 잊고 있었는데, 이 당시 일기장을 보니 사는 게 즐겁다고 쓰여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내 적성과 맞고, 즐겁고 동료에게 인정받는다는 것.

누군가의 인생에 손 하나 얹고, 그 누군가의 인생이 나에게 손을 얹어주는 이 일이 너무 좋다.



물론 지금 나는 협조 안 되는 환자에게 화도 심하게 내고 언쟁도 하고, 선을 넘는 동료에게 할 말을 너무 잘하는 그런 화가 가득한 사람이 되었지만

이런 성격이 분조장들만 가득한 ER에서 살아남고, 클 수 있게 해 준 것 같다.




그렇게 쫄보 3개월짜리 왕고는 벌써 깡다구만 가득한 1년 차 분조장이 되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