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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 Apr 14. 2020

이국인들의 공간 이태원

이태원의 역사_1 

이 글은 필자의 석사 논문인 『문화적 엔클레이브 이태원의 한국인 상인들』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다 대중적으로 이태원의 역사를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논문이 가진 학술적인 측면은 축소하고 인간 중심의 역사적 서술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태원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고유의 색을 잃지 않는 이태원이라는 이국적 공간, 그리고 그곳이 터전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태원이 언제부터 어떻게 이국적인 공간이 되었고 이국성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해 그려보고자 합니다.    


이국인들의 공간, 이태원의 시작


이태원이라는 지역이 보여주는 문화적 차이가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를 정확히 말하기란 쉽지 않다. 누군가는 그 시작을 청나라 상인들이 머물던 곳이라 주장하는가 하면, 또 누군가는 그보다 이전인 임진왜란 때까지 올려다보기도 한다. 어쩌면 이태원이 가진 문화적 이질성의 역사는 이러한 주장들처럼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오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는 그러한 논쟁의 여지를 남겨둔 채 이태원 역사의 시발점을 미군기지의 용산 주둔이 결정된 1950년대에서 찾고자 한다. 그 역사가 보다 오래되었다 할지라도 현재 이태원을 이해하는 데 있어 미군기지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만 미군기지가 한국의 수많은 지역 중에서도 용산에 주둔하게 된 이유가 일제강점기 일본이 용산에 가져온 변화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보다 앞선 시기인 일제강점기에서부터 그 역사를 살펴볼 것이다. 


이태원(梨泰院), 배가 많이 나는 지역이라 하여 조선 중기 효종 때부터 배 이(梨) 자를 써서 불렀던 이태원은 사실 조선시대까지는 그저 도성 남문 밖의 흔한 농경지였다. 남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가 많아 나무 키우기에도 좋고, 빨래터가 많아 아녀자들이 모여들었다던 이 곳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기 전까지는 현재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도 없을 만큼 아주 평범한 마을에 불과했다. 그런 이태원이 한국 안에서도 독보적인 이국적 공간으로 발전될 전조를 보인 것은 일제강점기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1904년 용산에 군사기지를 배치하게 되면서부터였다(용산문화원 2012:45). 


일제가 용산에 군사기지를 설치한 것은 이 지역이 갖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 용산은 한강변에 위치하여 한양도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서 일제가 군사기지를 설치하기 이전부터 마포·서강과 함께 상업·유통의 요충지로도 알려져 있었다. 용산은 전국의 모든 물산이 집결되는 곳이었고, 이 때문에 일본은 이미 1884년 수교를 통해 용산을 대외 무역을 위한 개시장으로 선택했다. 이로 인해 군사기지가 들어서기 이전부터 이미 용산에는 일본인 거주지와 상업시설들이 자리 잡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 아래 1904년 러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용산에 군사기지를 배치하게 된다. 상업적으로 가졌던 지리적 이점은 군사적으로도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ibid.:42). 그렇게 일제가 용산에 군사기지를 세우고 경성역에서 인천으로 이어지는 길목 중 하나로 용산역을 건설하면서 용산역 일대는 일본인들의 상업 공간이자 거주지를 넘어 한반도 최대의 군사·철도 기지로 자리 잡게 된다.


용산에 군사기지가 들어서자 자연스레 그 주변의 상권도 발전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 시기 발전했던 시가지는 이태원이 아닌 용산역 인근과 그 옆의 원효로 일대였다. 이태원 또한 군사기지 주변에 위치한 지역이었지만, 당시 이태원은 그저 밭과 과수원으로 이뤄진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반면 용산역 일대는 이미 조선말 대외무역을 시작한 이후부터 각종 물자가 모이는 유통의 중심지였던 데다가 용산역이 건설된 이후 그 영향력이 커져 역 주변으로 사람이 모여들었다. 일본 군인들을 상대로 한 음식점과 유흥업소들이 용산역을 중심으로 우후죽순 생겨났고, 그와 함께 원효로 일대에는 수많은 공장과 일본인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그렇게 1930년대가 되면 일본인 비율이 44%에 달할 정도로 용산은 경성 안의 일본인 주요 거주지로 발전했다(ibid.:65).      

    


매일신보 1913년 9월 5

"경성 내의 과수원은 이태원, 용산, 홍제원, 용산, 경성, 용산 등 6개소로서 모두 일본인의 경영으로 1개년 산출액은 6,197원인바, 그 중 포도가 1,783원, 복숭아가 1,424원으로 가장 많이 산출됨. "

(서울역사박물관 2010: 44)


용산기지도 1927년 (서울역사박물관, 2010: 41) , 오른쪽 위 편을 보면 이태원리와 황학동이 표시되어 있다. 
옛날에 승도복숭아 하면 대한민국에 서울 밖에.. 여기밖에 없었다고. 거 지금도 종자가 있어. 그리고 복숭아나무 밭이 저 보광동... 이쪽 전부고 또 이 뒤에가 전부 복숭아나무 밭이야. 외인주택이 전부 복숭아나 무밭이야. 고 아래 지금 저 마을금고 있는데 그쪽으로도 다 복숭아나무 밭이고. 

박영환, 남, 88세 (ibid.:43)


용산에 거주하는 일본인 비율에 비해 이 시기 이태원은 강과 산으로 막혀버린 고립된 지역으로 주거지보다는 과수원과 공동묘지가 주를 이루던 곳이었다. 인근에 일본 군사기지가 있었던 탓에 대부분의 과수원과 밭은 일본인 소유였지만, 이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은 한국인들이었다. 심지어 현재 이태원이 위치한 곳은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황학동으로 불리던 곳으로 위의 지도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이태원리라고 부르던 곳은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경리단과 해방촌 인근이었는데, 용산기지 형성 이후 마을 인근에 사격장이 생기면서 이태원리 사람들이 황학동으로 모두 이주해 왔고 이후 황학동은 이태원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여러모로 일제강점기 일본의 군사기지가 용산에 자리하게 된 사건은 이태원을 이국적인 공간으로 만드는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 시기에 보다 이국적이었던 건 일본인들의 주거지가 자리했던 용산역 인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제의 군사기지가 이태원의 역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 찾아온 변화는 이태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이후 이태원과 떼 놓을 수 없는 이국인인 미군을 끌어들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면서 비워진 용산의 군사기지가 한국전쟁으로 미군의 관리 하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1945년 광복 이후 한국 정치에 간섭했던 미군은 1949년 나라가 안정되어 가자 군사고문 500여 명 만을 남겨둔 채 한국을 떠났다. 하지만 바로 이듬해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이들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다시 돌아온 미군이 새로운 터전으로 삼은 것이 바로 일본군이 사용하던 용산기지였다. 1953년 전쟁이 끝나고 휴전협정이 이뤄지자 미군은 종로 동숭동에 있던 미 8군 사령부를 용산기지로 옮겼다(최종일 2003:26). 한국전쟁 이후 한국 곳곳에 기지를 배치했던 미국은 수도인 서울 안에도 자신들의 공간을 조성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용산기지가 미군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용산기지를 활용함으로써 굳이 새로운 군사시설을 갖출 필요도 없이 서울 한복판에 자신들의 영역을 만들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용산기지에 미군이 자리 잡게 되면서 이태원은 용산의 새로운 기지촌으로 성장하게 된다. 한국인의 땅이 된 지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용산 안의 또 다른 공간이 이국인에 의해 점유되어버린 것이다. 




참고문헌 

용산문화원,  2012, 『도시개발로 본 용산』, 용산항토사료편람(ⅩⅠ), 용산문화원

서울역사 박물관, 2010, 『이태원: 공간과 삶 』,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서울: 서울 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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