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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 May 27. 2020

이태원으로 모여라  

이태원의 역사_3

이 글은 필자의 석사 논문인 『문화적 엔클레이브 이태원의 한국인 상인들』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다 대중적으로 이태원의 역사를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논문이 가진 학술적인 측면은 축소하고 인간 중심의 역사적 서술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태원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고유의 색을 잃지 않는 이태원이라는 이국적 공간, 그리고 그곳이 터전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태원이 언제부터 어떻게 이국적인 공간이 되었고 이국성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해 그려볼 생각입니다.  


기지촌 사람들의 이주



매일경제 | 1970.02.02.    "두市場(시장)현대화 이태원 등 3월 착공"

용산구청은 민자 1억 7천8백여만 원을 투입하여 관내에 있는 제1시장과 이태원시장을 현대식 건물로 연내에 완공하기 위해 설계에 착수하는 등 ... 서둘고 있는데 3월 중 착공할 계획이다.


1960년대까지 이태원 상권의 중심지는 앞서 설명한 바 있는 유흥지대였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태원의 상권은 확장되는 모습을 보이는데, 유흥지대에 그치지 않고 이태원 전반을 상업지구로 만드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새로운 움직임은 1971년 이태원 재래시장 자리(현재 맥도날드 인근)에 건설된 현대식 아파트 인근에서 시작된다. 1971년 이태원에 새로이 건설된 현대식 아파트는 1층과 지하에 상가를 둔 주상복합 형태였다. 당시 아파트가 세워졌던 초반에는 1층에 청과물 시장이 들어섰는데 이전에 있던 재래시장을 이어 상권이 형성된 경우였다. 그러나 새롭게 단장한 이 재래시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식품이 아닌 의류를 중심으로 한 상가로 변하게 된다. 유흥지대가 시장 주변에 생겨났듯이 이태원의 또 다른 시장 주변에는 의류상권이 형성된 것이다. 그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1969년 미국 닉슨 대통령의 괌 독트린 발표였다.


괌 독트린으로 미군의 대대적인 감축이 결정되자 한국에 상주하던 미군부대 또한 대대적인 철수와 이전을 겪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1970년 7월 주한미군 한 개 사단의 감축 계획이 공식적으로 통보되면서 부평과 동두천에 있던 미군 부대들은 축소되거나 오산이나 용산 등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여 합병되게 된다. 그에 따라 인근에 있던 기지촌 사람들도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다른 기지촌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많은 이들이 옮겨 온 거처가 바로 이태원이었다. 그렇게 1970년대 초가 되면 대표적으로 1972년 부평에 있던 미8군 121 후송병원이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그곳에 있던 주변 상인들 1만여 명이 함께 이전한 것처럼 다른 지역의 기지촌 사람들이 이태원으로 몰려들게 된다(최종일 2003:33). 이러한 이주로 가장 많이 유입된 사람들은 아무래도 일명 '양공주'였지만 이와 동시에 기지촌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도 이태원으로 모여들었다. 양복점, 구둣가게, 군복에 명찰을 새겨주던 일종의 의류상인이 바로 그들이었다.     


나도 72년쯤에 왔는데 그때 파주 용주골 2사단 있던 데서 왔다고. 거기도 나름 기지촌이 있고 거기서 하다가 7사단, 동두천에 7사단 빠지고 2사단이 거기로 옮기면서 용주골에는 한국군이 들어오니까 여기로 옮긴 거지 기왕이면 기지촌 가서 하자 그래서. 기지촌에 있었으니까 기지촌으로 온 거지. 다른 데 안 가고, 누님은 남원 사람인데 그쪽으로 시집을 가면서 기지촌에서 일을 했고, 나는 누님 있는 데로 가서 일하다가 여기로 왔어.

 이동석, 남 64세


다른 기지촌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현대화된 이태원시장 인근이었다. 물론 이들이 이주해 오기 전에도 이태원에는 유흥업이 아닌 일반 상업공간이 존재했다. 하지만 양복점이나 구둣가게와 같은 일반 상점이 있던 곳은 부대와 가까운 이태원시장이 아닌 외인주택 인근 한남동 쪽이었다. 그러다가 기지촌 사람들이 이주해 왔던 시기에 이태원시장이 현대화되면서 새로 단장된 상업공간이 창출되었고, 이로써 기지촌 이주민은 이태원시장 주변으로 상권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기지촌 이주민이 유입된 초반 이태원시장 1층에는 아직 재래시장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주민의 상점 규모가 점점 커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과물을 팔던 재래시장은 의류상점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정확한 시기를 알기는 어렵지만 1970년대 중반, 이미 이태원시장이 의류상권으로 변해있었다는 증언을 고려해 보면 기지촌 이주민의 유입 이후 이태원의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다만 흥미롭게도 이태원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새로 이주해온 사람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던 이 시기를 이미 오래전부터 미군과 어우러져 살아가던 토박이들은 인상 깊게 기억하지 않고 있었다.      


글쎄, 70년대? 그때도 뭐 없었는데. 내가 그때는 요 앞에서 구멍가게 했는데. 이태원시장은 옛날부터 있었지. 그게 예전에는 청과물시장이었다고. 알지 무 팔고 생선 팔고. … 그러다 언제 옷집이 됐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고 앞에 언덕은 그때 절벽이었어. 큰길에도 있긴 뭐가 있어. 그냥 평범했지.               

홍성우, 남, 85세 (토박이)
장사하던 사람들은 토박이는 아니었지. 여기서 장사하던 사람들이 대부분 부평 미군부대 철거하면서, 부평 에스캄이라고 있는데 거기가 철거하면서 이쪽으로 옮겨온 사람들... 거기서 미군들 옮겨 오면서 거기 기술이 [재봉, 수선, 세탁 등] 다 여기로 옮겨오면서 시장이 형성된 거지. 내가 왔을 때는 이미 다 형성돼 있었어.       

김세창, 남, 68세 (이주민)
글쎄 왜 장사를 안 했을까. 그때 우리 아버님은 8군에서 일하고 계셨고, 어머니가 집에 딸린 가게에서 구멍가게 하시고. 아, 이태원 시장에서 친구 어머님이 가게를 하셨는데, 구시장일 때 몇 번 찾아갔던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해. 토박이들은 장사를 잘 안 했지.                                                            

정기훈, 남, 62세 (토박이)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고 재래시장이 사라지는 등 나름의 큰 격동이 일어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태원시장이 현대화되기 이전부터 이곳에서 살았던 토박이들의 기억 속에 1970년대 초의 이태원은 아직 발전하지 못한 지역일 뿐이었다. 이는 이태원시장의 변화가 이태원 전역에 미친 영향이 점진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러한 변화가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저 미군에 의지하는 삶의 또 다른 방식이 이태원 한편에 늘어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느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즉, 이러한 변화가 당장 그들의 삶에 영향을 줄 만한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로 토박이들은 새로 단장한 이태원시장에서 상업활동을 시작하지 않았다. 당시 토박이들은 이미 생계를 유지하는 자신만의 방식이 있었기에 새로운 일을 시작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리라 짐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이 이후 이태원의 의류시장이 확장되고 관광시장으로 발전한 이후로까지 이어져 의류상권에서 토박이 출신의 상인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을 만들게 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그러나 이태원시장의 변화가 토박이들에게 어떻게 경험되고 기억되었든 간에 이 사건은 분명 이태원 전체에 영향을 줄 만한 사건이었다.



참고문헌

최종일, 2003, "이태원 공간에 나타난 '아메리카나제이션(Americanization)'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석사학위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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