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의 역사_4
이 글은 필자의 석사 논문인 『문화적 엔클레이브 이태원의 한국인 상인들』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다 대중적으로 이태원의 역사를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논문이 가진 학술적인 측면은 축소하고 인간 중심의 역사적 서술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태원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고유의 색을 잃지 않는 이태원이라는 이국적 공간, 그리고 그곳이 터전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태원이 언제부터 어떻게 이국적인 공간이 되었고 이국성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해 그려볼 생각입니다.
이태원시장이 현대화되고 이곳에 다른 기지촌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자리 잡은 일은 단순히 새로운 상업공간의 창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이태원의 미군과 관련된 이국성을 표현하는 새로운 공간이 창출되었음을 의미했다. 즉, 기지촌 사람들의 이주로 인해 이태원시장이 드디어 한국 사람이 아닌 미군이 드나드는 공간으로 변화하면서 소방서 뒤편 유흥지대와 함께 이곳이 이태원을 대표하는 이국적인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의 창출은 이태원이 일반적인 기지촌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후 이태원시장에 형성된 의류상권이 점차 영향력을 키우게 되면서 이국성을 대표하는 공간을 넘어 이태원 전반을 변화시킬 힘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비록 이태원의 의류상권이 이태원의 변화를 이끈 유일한 요소였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1970년대 이태원에 의류상권이 형성되지 않았더라면 이태원이 지금과 같은 역사를 갖지 못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태원의 의류상권이 그만한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은 상권이 형성되던 당시 이태원에 영향을 준 서울시의 도시계획 덕분이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 한국정부는 강남권 개발을 시작했다. 그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강남으로 가는 길목을 잇는 것으로 당시 서울의 중심부였던 종로에서 강남으로 가는 지름길을 뚫는 도시계획이 진행됐다. 그렇게 1969년 한남대교가 완공되고 1970년에는 남산 1호 및 2호 터널이 개통되었다. 한남대교와 남산터널의 개통은 종로에서 강남으로 가는 시간을 절반 이상 줄여주었는데, 그 중간지점에 이태원이 자리하게 되면서 이태원도 자연스레 개발지역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강남개발이 빠르게 진행되던 상황에서 새로운 경로에 통행량이 늘어나자 그 길목에 있던 이태원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도시계획으로 인해 교통이 발전하자 자연스레 도로정비도 이뤄졌고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기도 편리해졌다. 실제로 이태원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이태원역 1번 출구에 있는 '해밀턴호텔'도 1973년에 완공되었고, 대로변에 자리한 많은 건물들이 이 시기에 완공되었다. 1971년 현대화된 이태원시장 또한 이러한 흐름 위에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렇게 이태원은 이주민들의 대거 유입과 함께 도시계획으로 인한 표면적인 변화 또한 겪게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지리적 이점은 이태원 안에서도 특히 이태원 의류상권의 발전에 영향을 주면서 이태원만의 독특한 풍경을 만드는 데 일조하게 된다.
도시계획은 그 자체로 이태원에 지리적 이점을 가져온 사건인 동시에 이태원이 서울에 위치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과의 차별성을 가질 수 있었음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모든 기지촌에는 분명 그 나름의 형태로 의류상권이 존재했지만 그 어떤 기지촌도 이태원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차이가 생긴 데는 여러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이태원이 서울 중심에 위치했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이태원의 의류상권은 도시계획이라는 외부적 요인과 맞물리며 폭발적으로 확장되기 시작한다. 장사를 하려는 사람도, 물건을 사려는 사람도 끊임없이 늘어났다. 의류상권은 이태원시장 일대를 넘어 대로변 전반으로 퍼져나갔고, 점차 지역 안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