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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 Jun 05. 2020

이태원 의류상가, 역사의 시작

이태원의 역사_5

이 글은 필자의 석사 논문인 『문화적 엔클레이브 이태원의 한국인 상인들』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다 대중적으로 이태원의 역사를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논문이 가진 학술적인 측면은 축소하고 인간 중심의 역사적 서술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태원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고유의 색을 잃지 않는 이태원이라는 이국적 공간, 그리고 그곳이 터전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태원이 언제부터 어떻게 이국적인 공간이 되었고 이국성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해 그려볼 생각입니다.


미군에 의지하는 삶 

    


외국인촌으로 표현되는 이태원에 대한 기사

경향신문 | 1971.06.24.   서울 새風俗圖(풍속도) (183) 外国人村(외국인촌) [33]“

경고판 뒤쪽에는 유엔 홀이 있다. 「외국인전용업체 당업소에는 한국인남성 출입을 금함」 이 홀 입구안쪽 벽에는 이런 글이 씌어 붙여있다. 미8군 뒷문과 외국인촌사이의 이 지역은 미군을 위한 유흥가로 되어버린 것이다. 어느 토요일 하오, 10도경사의 오르막길 양쪽에는 꾀죄죄한 히피풍차림의 흑백청년들이 어슬렁거리고 어느 가게 앞 얼음박스 위에는 트기 아가씨 하나가 걸터앉아 백인청년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 



1970년대 초 이태원은 ‘외국인촌’으로 불리며 한국 안의 문화적 엔클레이브로 인식되고 있었다. 특히 이태원은 미군을 위한 유흥가로 유명해져 있었는데, 이는 이때까지만 해도 이태원을 대표하는 공간이 소방서 뒤편 유흥지대였다는 것을 뜻했다. 이태원의 클럽들은 누구보다 빠르게 미국의 음악과 문화를 들여왔고,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마약같은 물건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공간이되어갔다. 이태원이 표현하는 이국성은 단순히 문화적 차이에서만 오는 것이 아닌 접근하기 힘든 음지의 무언가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태원은 단순히 '미군을 위한 환락가'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나의 상업공간으로써 의류상권이 지역의 특성을 표현하는 공간으로 급격히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70년대 초에는 군인들이나 있었지 그때는 뭐 가족이랑 오는 사람도 없었고 군인들만 있고 아니면 군대 안에서 일하던 근로자들이 손님이었지… 이태원시장 지하에는 식당이랑 주점이 있었고, 지금은 옷 집 가득가득 차있지? 근데 그때는 공간도 확 트여있고 주점이랑 그런 게 있었다고. 1층에는 식자재 파는 가게 있었고. 위에는 아파트. 그거 중심으로 콜터장군있는 쪽[현 녹사평역 부근]으로 모서리에만 가게들이 쭉 늘어서 있었어, 이태원시장 있는 데는 밖에 고기 걸어 놓고 팔고, 그 안쪽으로 골목에도 가게들 좀 있고. 여기 콜터 장군 있는데 미 8군 게이트가 있었고 하니까.  

이동석, 남, 64세 

 

1970년대 초 전국의 미군부대가 재편되면서 이태원시장으로 옮겨온 다른 지역의 기지촌 사람들은 본래 있던 곳에서 하던 일을 그대로 이태원에서 하게 된다. 양복집을 하던 사람은 양복집을, 청바지를 팔던 사람은 청바지를, 중국식 하우스코트를 팔던 사람은 하우스 코트를 팔았다. 이들이 처음 의류상권을 형성한 공간은 현재보다는 협소한 이태원시장과 미군부대 사이의 구역이었는데, 이들이 이주해 오던 당시 이태원시장은 여전히 재래시장이었고 이미 부대가 형성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오게 된 이들은 부대 내에서는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은 이태원시장 인근에서 미군부대 게이트가 가까운 지역뿐이었다. 이 공간은 부대 안 보다는 못했지만 가장 부대와 가까운 공간으로써 이주민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까지도 이 구역에 남아 있는 양복점들은 초기 이주민들의 흔적을 보여준다.      

         

 기지촌 이주민은 다른 기지촌에서 이주해왔던 만큼 이들이 운영하는 의류상점들 또한 주로 양복점이나 자수집처럼 미군들을 상대하는 곳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들이 자리잡은 이태원시장 인근은 점점 한국 사람이 아닌 미군이 드나드는 공간이 되어 가는데 이러한 상점들은 이 구역으로 미군의 발길을 이끌며 새로운 공간으로 변화를 짐작케 했다. 초반에는 작은 규모로 자리했다는 점에서 아직 지역의 특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으로 자리했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곧 이러한 의류상점들은 그 수를 늘려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태원시장 자체를 의류를 중심으로 한 상업지역으로 만듦으로써 지역의 이국성이 강렬하게 드러나는 공간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발전 과정은 기지촌 이주민의 유입과 함께 이들을 통해 2차적으로 유입된 가족과 동향사람을 통해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파주에 있다가 친척 누님 따라서 여기 왔어. 그 당시에 파주에 있던 미군기지가 한국군으로 바뀌면서 사람들이 이제  여기 오거나 오산 쑥고개로도 많이들 갔지.         
                                                             
 이동석, 남, 64세


74년에 삼촌 따라 서울 왔다가 친구가 이태원에서 세탁소 해가지고 이태원 들어왔지. 76년이었나 맞는 거 같아. 친구는 종업원이었고 여기서 세탁소 하던 사람이 미군부대 들어가서 하게 됐다고, 가게 비니까 한번 해보라고 그래서 같이 시작했어.         

김희광, 남, 59세


1970년대 초중반 이태원에 들어온 기지촌 이주민을 따라 동향사람이나 친척들 또한 이태원에 지속적으로 유입되었다. 이런 식의 혈연이나 지연에 따른 이주는 사실 서울 전반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이태원시장 인근에서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이는 당시 이태원시장 주변에 형성된 가게들의 이름이 지역성을 띤다는 데서도 나타났다. 


이태원 시장에서 충남상회가 제일 컸는데 그 가족들이 오고 그러면서 다른 주택 얻어서 다시 짓고 점포 여러 개 들어가는 가게로 만들고 충남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었어...그 사람들이 저기 지금 나이키 자리[대로변 중앙에 위치] 원래 주택이던 거 새로 건물 세워서 여러 칸이 나오게 만들어가지고 사람들 가게 세주고 작게 나눠서 여러 집들 합쳐서 50평씩 되면 짓고.                                                   

이동석, 남, 64세


이태원시장 인근의 기지촌 이주민이 서로의 가족과 지인을 불러들이며 사업을 확장해 나가자 의류상권의 규모 또한 자연스레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방식의 이주는 이태원시장을 재래시장에서 의류상권으로 변화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의류상권을 대로변 전반으로까지 확장시켰다. 상인들은 장사가 잘되기 시작하면 가족들을 하나둘 불러들여 사업을 확장했고, 그 규모가 커지며 이태원시장 인근만으로는 감당 할 수 없자 의류상점들이 대로변 전반으로 퍼져나가게 됐다. 이 과정에서 혈연이나 지연에 의해 이태원에 온 사람들이 함께 사업을 확장하는 동시에 가족 사업에서 벗어나 개인적으로 가게를 여는 경우도 생겨났다. 어린 시절 가족을 따라서 온 사람들이 나이가 듦에 따라 본인의 가게를 따로 차리게 되고 그렇게 점포의 수는 급격히 늘어나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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