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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 Jun 12. 2020

미제 옷 팔아요!

아태원의 역사_7

이 글은 필자의 석사 논문인 『문화적 엔클레이브 이태원의 한국인 상인들』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다 대중적으로 이태원의 역사를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논문이 가진 학술적인 측면은 축소하고 인간 중심의 역사적 서술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태원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고유의 색을 잃지 않는 이태원이라는 이국적 공간, 그리고 그곳이 터전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태원이 언제부터 어떻게 이국적인 공간이 되었고 이국성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해 그려볼 생각입니다.


보세옷과 짝퉁의 시작     


1960년대 한국은 경공업 중심의 수출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은 부족한 부존자원에 비해 넘치는 노동력을 갖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원재료를 수입해 가공한 뒤 다시 수출하는 가공무역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수출품들은 보세 특혜를 받았고, 제조공장에서 수출을 보내고 남은 물건들이 보세라는 이름으로 한국 시장에 풀리게 된다(서울역사박물관 2010:75). 이런 보세물품들은 초기에는 상표 없이 시장을 떠돌거나 상표가 있다 해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시장에 풀렸고, 1970년대 형성된 이태원의 의류상가에도 이런 식으로 시장에 풀린 보세품들이 유입됐다.


우리는 무슨 브랜드인지도 모르는 데 미국 애들은 다 아니까 잘 사가는 거야. 폴로 같은 거 그때 엄청 유명했어. 폴로셔츠 알지? 미국에서는 그래도 비싼 데 여기서는 1-2 달러면 사니까. 눈이 뒤집혀서 사가지. 한국 사람들은 뭔지도 모르고 팔았는데 이게 잘 팔리니까 가져다 팔고.                                           

이정숙, 여, 60세

  

사실 보세품은 상권이 형성되던 초기에는 이태원 상인들에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 시기의 이태원 의류상권은 아직 양복점과 자수집 등을 중심으로 한 작은 규모였던 데다, 아직 한국에서는 시장에 풀렸던 보세품의 브랜드가 알려지기 전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인들의 관심과 별개로 보세옷은 미군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상인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를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상표도 없이 들어오던 보세품들은 이후 점점 그 브랜드와 가치가 알려지면서 미국인뿐만 아니라 한국을 찾는 관광객과 한국인 사이에서도 인기를 얻게 되었고, 이태원의 의류상인들은 이런 보세품들을 청계천의 평화시장 등을 통해 떼어와 본격적으로 팔기 시작했다. 그렇게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이 되면 이태원은 이미 한국 안에서도 유명한 보세상권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경향신문 | 1982.02.25.   “청계천 6가 의류상가


지난 79년부터 도심재개발사업이 마무리되면서 서울운동장 옆 청계천 6가에는 덕운, 제일평화, 남평화, 광희, 운동장평화시장 등이 차례로 들어서 대규모의 의류상가 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이태원 명동 이대입구 등 이름난 보세 가게 옷들도 대부분 이곳에서 구입해다 파는 것들..



여기가 미국 사는 사람들보다 옷을 먼저 살 수 있는 데니까, 멋쟁이들은 여기로 옷 사러 왔지. 보세란 게 그런 거잖아, 미국으로 갈 거 좀 하자 있거나 남으면 가져다 파는 거, 그러니까 우리가 미국 사람들보다 더 먼저 입는 거지 거기서 유행할 거를. 

김희광, 남, 59세


당시 이태원에서 보세품으로 유명했던 브랜드는 명품보다는 미국에서 유행하던 캐주얼 의류 브랜드로 가죽 가방보다는 셔츠나 운동화 브랜드에 대한 보세품이었다. 특히 이태원에서 주로 취급했던 것은 폴로, 죠다쉬 같은 브랜드였다(김은실 2004:35). 이는 이태원의 의류시장이 미군을 대상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며 보세 상권의 규모가 커지자 이태원은 다른 지역의 보세 상권과 차별된 미국의 색채가 진한, 미국에서 유행하는 옷을 미국 사람보다 빠르게 접할 수 있는 공간으로 유명해진다. 미국에서 하청 받은 물건이 미국에 도착하기 전 한국 시장에 먼저 풀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이태원의 보세옷이 미군을 상대로 했다는 점은 유행과는 또 다른 방향에서 이태원만의 독특한 상품을 만들어 내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이태원이 한국 안에서도 보세 상권으로 유명해질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미국에서 유행하는 옷들을 취급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보세옷이 한국에서는 찾기 힘든 다양한 사이즈를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이태원에서 취급하던 보세옷은 주로 한국인보다 큰 체격을 가졌던 미국인을 대상으로 만들었던 것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한국의 여타 지역에서는 찾기 힘든 큰 크기의 옷들은 이태원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끌었다. 보세품에서 시작한 큰 사이즈의 옷은 특화되어 큰옷전문점의 형태로 발전했고 이후 이태원만의 특성을 띤 주요 업종으로 자리 잡기도 한다. 그러니 현재까지도 이태원에서 발견할 수 있는 큰옷전문점들은 이곳이 과거 미군과 관련된 지역이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전에는 처음 왔을 때는 남의 집 일했어, 아줌마가 빅토리타운에서 일했잖아. 그때는 손님이 너무 많아서 바빠 가지고 밖이 어떤지 알 수도 없었어. 주변은 뭐가 있었는지도 몰랐지. 빅토리타운은 그때 다 미군들 아니면 미군 가족들, 미군 보러 온 가족들이 많이 사 갔지 한국 사람은 거의 없었어…... 부대 밖에 사는 애들은 가난한 애들이고, 여기가 빈민촌이었다고 예전에는... 부대 안에 있던 군인들 그리고 가족들이 많이 사러 왔어.

서영인, 여, 57세


그러나 보세옷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태원 의류상권의 주요 고객은 미국인이었다. 다만 이 시기에 이태원 의류상권은 더 이상 군인만의 공간이 아닌 일반 관광객으로서의 미국인의 방문이 잦아졌다는 점에서 작은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1970년대 후반, 보세품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하던 이태원 의류상권은 한국 안에서도 명성을 얻게 된 것과 동시에 미국인 관광객 사이에서도 유명한 쇼핑명소로 알려지게 된다. 여전히 관광객은 미군의 가족이나 친척과 같은 미국인이 대부분이었지만 군인이 아닌 일반 관광객이 이태원 의류상권을 채우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앞으로의 변화에 있어 커다란 전환점이 된다. 



참고문헌

서울역사박물관, 2010, 『이태원 : 공간과 삶』,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서울: 서울역사박물관        

김은실, 2004, 『변화하는 여성문화 움직이는 지구촌』, 한국여성학회 편, 푸른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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