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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 Jun 28. 2020

에어라인 보따리상

이태원의 역사_8

이 글은 필자의 석사 논문인 『문화적 엔클레이브 이태원의 한국인 상인들』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다 대중적으로 이태원의 역사를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논문이 가진 학술적인 측면은 축소하고 인간 중심의 역사적 서술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태원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고유의 색을 잃지 않는 이태원이라는 이국적 공간, 그리고 그곳이 터전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태원이 언제부터 어떻게 이국적인 공간이 되었고 이국성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해 그려볼 생각입니다.


미군이 아닌 관광객


그 사람들(승무원) 올 때는 가게 문도 일찍 열고 그랬어요. 9시면 늦게 나오는 거고 이 사람들은 아침 일찍 오니까 8시 안 돼서 여는 가게도 많았어요. 뭐 호텔에서 묵는 사람들이 일찍 나오는 경우도 많았고. 특히 시장 쪽은 일찍 나왔는데, 그때는 일찍 나와서 늦게 들어갔어요. 장사가 잘되니까.                                    

박주민, 남, 55세     


이 시기 새로 유입된 관광객 중 의류상권이 변화하고 있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준 존재는 바로 비행기 승무원이었다. 승무원들은 상인들의 기억 속에 꽤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손님 중 하나였다. 이 시기 이태원을 방문하는 승무원들 또한 주로 미주권에서 오고는 했는데, 이들은 이태원 의류상권이 ‘미군’이 아닌 외국인이 드나드는 공간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주었던 존재인 동시에 일종의 보따리상으로서 이태원 의류상권의 규모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을 자주 드나들 수 있었던 승무원들이 미국에서와 같은 제품이지만 저렴한 가격을 갖고 있던 보세옷과 맞춤옷을 대량으로 사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1960년대부터 지속된 저렴한 인건비에 기반을 둔 수출 지향적 산업화가 이태원에서 빛을 내게 된 순간이었다(김은실 2004:35). 그런 식으로 승무원과 보세옷의 조합은 이태원의 거래 규모를 키움으로써 자연스레 이태원 의류상권을 성장시켰다.  


에어라인, 여자 승무원들, 주로 미국 항공사 이 사람들이 구두니 일스킨[뱀장어가죽], 가방을 엄청 해갔다고 2-3단짜리 이민가방에 한가득 사갔다고 이 사람들이 거기서 장사를 하는 건지 그냥 주문을 받아오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한창 그랬어.

이동석, 남, 64세     


승무원은 이민가방이라 불리는 큰 가방에 물건을 담아가 미국에서 팔았는데, 수출이라고 말하기에는 작은 규모였지만 이들에게 용돈벌이를 해줄 수 있을 정도로 당시의 한국의 물가는 미국과 큰 차이를 보였다. 승무원이 취급하는 물건은 시간이 지나고 유행이 바뀜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이후 한국의 물가가 상승하면서는 결국 이들의 발길이 끊기게 되지만, 승무원의 존재는 분명 이태원의 발전 과정에서 주목해볼 만 하다. 승무원 보따리상의 등장 이후 이태원에는 다양한 국적의 보따리상이 유입돼 대규모 거래가 보편화된 동시에 이들로 인해 이태원이 외국인 관광객 사이에서도 더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이태원 의류상권에 점차 미군이 아닌 일반 관광객의 비중이 늘어나고 거래 방식에 변화가 오면서 이태원 의류상권의 성격도 점차 변화하게 된다. 


예전에 뉴발란스 같은 거는 100 만장씩. 부산 신발공장에서 수출 나가고 동대문 오면 그걸 이태원 사람들이 가볍고 좋으니까 사가면 미군들은 또 브랜드를 아니까 사가고 이다음에 브랜드를 알게 되면서 짝퉁을 만들게 된 거죠.           

정기훈, 남, 62세   

  

그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짝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이 시기 이태원에서 취급되던 짝퉁은 보세물품을 찾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에 비해 생산량이 한정되어 있었던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즉 이 시기에 짝퉁이라는 것은 이후 1980년대부터 이태원을 휩쓸었던 명품 짝퉁이 아닌 캐주얼 의류 브랜드의 카피 제품이었다. 늘어나는 수요에 비해 양이 정해져 있던 보세옷은 점점 그 양이 부족해졌고, 손님은 있지만 물건은 없어 팔 수 없는 상황이 오자 상인들은 제조 기술을 알고 있는 공장과 함께 디자인은 같으면서도 원자재가 다른 짝퉁을 만들어 냈다(ibid.:35). 이러한 짝퉁은 공장에서 제품을 받아와 이태원의 가내공장에서 찍어낸 마크를 붙여 파는 형식이었기 때문에(서울역사박물관 2010: 241), 이 시기가 되면 이태원 곳곳에 가내공장 또한 들어서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개인 양복점에서 가죽도 주문을 받아서 작게 했는데 이게 점점 잘되니까 따로 가죽 전문점이 생긴 거지. 그때 타이거였나? 그런 식의 가죽 전문점이 처음 생기고 나서부터 그 가게가 잘되니까 우후죽순으로 생기기 시작한 거지. 77년도인가 박정희 죽기 전이니까 그때쯤 그랬을 거야.                              

김희광, 남, 59세


그리고 짝퉁과 함께 이 시기에 생겨난 주목할 만한 변화는 이태원에 가죽 제품이 등장했다는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양복점에서 조그맣게 같이 다루던 가죽 제품이 미군이 아닌 일반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수요가 늘자 개별적인 상품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1970년대 후반 유행하기 시작한 가죽 제품은 일명 일스킨(eel skin), 즉 뱀장어 가죽으로 만들어진 제품이었는데, 이러한 일스킨이 유행하면서 이태원에는 다양한 종류의 가죽 제품 또한 취급되기 시작했다. 가죽 제품의 등장은 이태원에 일반 관광객이 유입되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이후 이태원에 관광객을 이끄는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매일경제 | 1976.09.25.  "수출유망상품 (10) 뱀장어가죽 제품"

73년 이전만 해도 뱀장어는 요리 시 폐기물로 버려지던 가죽이 이제는 제품화되어 각광받는 상품으로 등장… 74년도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동 제품 (여자용 핸드백, 신사용 장갑, 지갑, 골프장갑, 의류)이 개발되어 견본용으로 시험 수출된 바 있는데 당시 일본으로부터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뱀장어 가죽으로 만든 부츠 


뱀장어 가죽은 현재는 찾아보기 힘든 제품이지만, 한 때 이태원의 주력 상품으로 여겨졌을 만큼 1970년대 후반 보세물품과 함께 이태원 의류상권을 확장시키는 데 일조한 제품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만 유일하게 생산했던 뱀장어 가죽 제품은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해 1970년대 후반이 되면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뱀장어 가죽은 다른 가죽에 비해 가볍고 부드러우면서도 질겼기 때문에 인기를 끌었다. 지갑, 벨트, 신발, 가방, 재킷까지 뱀장어 가죽으로 만들지 못하는 제품이 없었는데, 특히 이런 뱀장어 가죽이 이태원에서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뱀장어 가죽이 미국인 사이에서 행운의 상징으로 통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직은 미국인이 주를 이루던 시기 손님층의 취향에 맞춘 제품이 발달한 것이었다. 

뱀장어 가죽 지갑. 뱀장어 가죽은 얇아서 색을 입히기 좋았다고 한다. 


뱀장어 가죽의 인기는 일반 가죽 제품에 대한 소비 또한 증가시켰다. 점진적으로 늘어나던 관광객은 이제 양복과 보세옷을 넘어 가죽 제품에도 눈을 돌렸고, 가죽은 양복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와 비슷하게 좋은 제품에 저렴한 가격이라는 장점으로 관광객에게 주목받는 새로운 품목으로 자리하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가죽제품의 등장으로 이태원 의류상권이 한층 더 성장함에 따라 보세품 짝퉁으로 인해 형성된 가내공장 또한 그 성격이 변하는 동시에 그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가죽 제품이 인기를 끌기 전까지는 캐주얼 의류에 대한 짝퉁을 만드는 공장이 주였다면, 점차 관광객이 늘고 가죽 제품이 인기를 얻게 되면서는 가죽을 다루는 공장이 늘어났다. 특히 가죽을 다루는 공장은 이후 이태원의 주력상품이 되는 짝퉁을 생산해내는 공장으로 변화한다는 점에서 주목해볼 만하다. 그렇게 가내공장의 수가 늘어나는 만큼 의류상권은 점점 성장해 갔고 이 시기를 거치며 이태원 의류상권은 초기 양복점과 자수집을 중심으로 한 작은 규모에서 벗어나 이태원을 이끌어가는 새로운 중심지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이처럼 1970년대 후반이 되면 이태원 의류상권은 이미 일반 관광객의 유입에 따라 미군과 관련된 성격이 약해져 가고 있었다. 다만 이곳의 변화가 이태원 전체의 변화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빠른 성장세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태원 의류상권은 지역을 변화시킬 만한 영향력을 갖지 못했고 의류상권을 제외한 이태원의 대부분 지역은 여전히 미군들을 중심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즉, 이태원을 한국의 여타 지역과 다르게 만드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건 여전히 미군이었다. 그런 이태원이 미군의 색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게 된 것은 1980년대가 된 이후였다. 빠르게 성장하던 이태원 의류상권은 1980년대가 되면 드디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영향력을 갖게 되었고 이는 미군만큼이나 관광객이 이태원의 문화적 특성을 만들어내는 데 영향력을 미치게 됐다는 것을 뜻했다. 이제 이태원은 더 이상 미국이라는 단일한 국가에 한정되지 않은 보다 국제화된 모습을 갖게 됐다. 이태원을 이국적으로 만드는 구성원의 다양성은 늘어났으며, 이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또한 그에 맞춰 보다 국제화되고 있었다. 



참고문헌 

서울역사박물관, 2010, 『이태원 : 공간과 삶』,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서울: 서울역사박물관

김은실, 2004, 『변화하는 여성문화 움직이는 지구촌』, 한국여성학회 편, 푸른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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