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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 Jul 03. 2020

ASTA 총회, 이태원을 알리다

이태원의 역사_9

이 글은 필자의 석사 논문인 『문화적 엔클레이브 이태원의 한국인 상인들』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다 대중적으로 이태원의 역사를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논문이 가진 학술적인 측면은 축소하고 인간 중심의 역사적 서술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태원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고유의 색을 잃지 않는 이태원이라는 이국적 공간, 그리고 그곳이 터전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태원이 언제부터 어떻게 이국적인 공간이 되었고 이국성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해 그려볼 생각입니다.


황금기의 시작 


1970년대 후반 보세품이 유입된 이후 이태원 의류상권은 이제 완연히 외국인 관광객 사이에서 유명 쇼핑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에 따라 상권의 규모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현재와 비슷해지는데, 1980년 초에는 이미 현 녹사평역 인근 이태원 입구부터 소방서까지 약 700여 개소의 점포가 이태원 의류상권에 자리하고 있었다(동아일보. 1983.07.27). 그렇게 대로변에 새로이 확장된 공간에는 미군이 아닌 일반 관광객을 위한 관광상품 이 주를 이루게 되며 공간의 성격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태원 의류상권은 이제 미군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처럼 의류상권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태원은 여전히 외부에서는 미군을 위한 유흥공간이 자리한 지역으로 더 알려져 있었다.      


다른데 보다 소방서 쪽 저기 술집[소방서 뒤편 유흥지대]이 유명해서 그때는 방배나 다른 데 술집이 아직 생기기 전이라 술 마시는 사람들은 다 이태원으로 왔어. 외국 사람들, 한국 사람들 놀기 좋은 데가 이태원이었던 거지.

문기정, 남, 67세     


의류상권의 규모는 매해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한국 안에서 이태원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공간은 의류상권이 아닌 미국식 술집과 클럽이 자리한 유흥지대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이러한 상황이 곧 변화하여 유흥지대가 아닌 의류상권 이태원의 문화적 이질성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공간으로 알려지게 되는데, 그러한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1983년 9월 서울에서 열린 ASTA 총회였다. 미주여행업협회에서 주최하는 이 총회는 각국의 관광상품을 경합하기 위한 자리로서 전 세계의 관광업계 사람들을 서울로 이끌었고, 이 행사를 계기로 이태원 의류상권은 급격하게 성장하게 된다.     



동아일보 | 1983.07.27. "서울 속의 아메리카」 이태원 환락과 호화주택 완전 이방 지대」를 가다"


서울시는 이태원을 IPU(국제의회연맹)와 ASTA(미영행자협회) 총회 등 국제행사를 앞두고 외국인 전용의 전형적인 쇼핑가로 가꾸기로... 또 국제 관광공사도 앞으로 대외관광안내책자와 팸플릿 등에 이태원을 포함, 이곳을 외국인 관광명소로 널리 선전할 방침이다. ...미군주둔이 낳은 서울 속의 이색지대 이태원. 이태원은 이제 단순히 미군의 환락 지역을 벗어나 특성 있는 한국 속의 국제촌으로 발돋움하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1980년대 초반 ASTA 총회를 준비하던 서울시는 총회에 방문한 사람들에게 선보이기 위한 한국의 관광지를 개발했다. 서울시가 ASTA총회를 위해 마련한 쇼핑지로서는 이태원을 포함해 남대문과 동대문 등 규모가 크고 역사가 있는 상권 또한 소개되었지만, 당시 총회에 참석한 외국인들이 가장 즐겨 찾았던 것은 아무래도 이태원이었다(매일경제 1983.09.27). 남대문과 동대문보다 규모는 작아도 한 거리 안에 다양한 물건이 총망라되어 있었던 데다가 오랜 기간 미군을 상대해 온 상인으로 구성된 공간이었다는 점에서 비교적 소통이 편리해 외국인에게 인기를 끌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을 기반으로 이태원 상권이 취급하던 제품의 품질과 가격은 관광객에게 매력 요소로 작동했다.      



 매일경제 | 1983.09.26.  "한국서의 總會(총회회원국들에 利益(이익)“

3~4일 전부터 ASTA총회에 참가 외국인들로 붐비고 있는 이태원 일대….. 어느 외국인은 신발 5켤레 보세 실크 2백 여벌을 구매하는 경우까지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이태원동에서 양복점 점원으로 있는 황건호 씨(33)는 “외국인들이 오전 일찍부터 몰려오고 있고 이들로 인해 평소보다 2배 이상 주문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태원을 외국인들이 선호하는 이유는 가격이 싸며 언어장벽이 없고 그들의 기호를 잘 맞추어 주기 때문일 것이라고 ⌜빅토리타운⌟의 선경열 지배인은 말한다.     


 

이태원 의류상권이 취급하던 제품의 저렴한 가격과 높은 품질은 군인과 마찬가지로 관광객에게도 매력적인 요소로 여겨졌다. 그러나 관광객의 방문은 군인만이 의류상권의 고객이던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이태원에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절대적인 방문객의 수가 늘어난 것도 있었지만, 비교적 장기간 한국에 머물던 군인과 달리 단기간에 쇼핑을 마쳐야 했던 관광객은 군인보다 1회 소비량 또한 컸던 덕분이었다. 이들은 양복, 구두, 보세옷, 가방 등 다양한 물건들을 한 번에 대량으로 소비했고, 이러한 관광객들의 소비 형태로 인해 이태원 의류상권은 급격한 경제적 성장을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성장을 경험했던 덕분인지 ASTA총회는 황금기의 시작으로 상인들의 기억 속에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83년 초에 ASTA총회를 하면서. 이게 주미관광여행 업계 총회인데 이거를 한국서 하면서 한국이 관광 쪽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거야. 이 사람들이 이제 관광일하면서 한국에 오면 ‘이태원을 꼭 들렀다 와야 한다.’ 이렇게 홍보를 하니까 외국인들이 여기를 꼭 들렀다 가는 거지. 그러다가 이후에 IPU총회를 또 한국에서 하면서 한국의 이태원이 알려지게 되고.                                                 

 이동석, 남, 64세     

  

그러나 ASTA 총회가 이태원에 가져다준 변화는 단순히 경제적인 이익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총회를 계기로 1970년대 후반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던 미군과 관련된 지역성이 본격적으로 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데 있었다. 특히 ASTA 총회가 일반적인 행사가 아닌 관광업계 사람들을 위한 행사였다는 점은 이러한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총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관광업계에 종사했다는 점에서 이 행사는 단기적으로 이태원에 사람을 이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태원을 각 국가에 홍보함으로써 장기적으로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관광객을 이태원으로 이끌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ASTA 총회 이후 이태원에는 미국인을 넘어 유럽과 동남아, 일본 등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이 방문하기 시작한다.


80년대부터는 중국계 동남아인들도 많이 있었지 싱가폴 홍콩 대만 말레이시아 이쪽에서 많이 온 게, 이전에 여기 2층에 화교가 장사하던 가게가 있었다고. 여행사를 했는데 거기서 데려온 관광객들이 한창때는 관광버스로 10대씩 오고 그랬어, 이 사람들은 이제 가짜 가방이나 신발 운동화 같은 거 좋아해서 많이 사갔지.     

 김세창, 남, 68세     


그렇게 과거 미군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이태원 의류상권의 성격은 ASTA 총회를 기점으로 점차 변화하게 된다. 아직 용산기지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태원의 많은 영역은 여전히 미군에 의지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적어도 의류상권만큼은 그러한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있었다.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관광객을 통해 새로운 문화적 이질성을 표현하는 의류상권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의류상권이 이태원 내부에서 갖는 영향력도 자연스레 커져갔다. 이태원 의류상권의 변화가 이태원 자체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1983년 ASTA총회를 계기로 의류상권이 성장할수록 이태원이 보여주던 미군의 색채는 옅어져 갔고, 그 특성 위에 관광객이 만들어 내는 국제화라는 새로운 색이 덧칠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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