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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 Oct 08. 2020

세일즈 모집 합니다!

이태원의 역사_11

이 글은 필자의 석사 논문인 『문화적 엔클레이브 이태원의 한국인 상인들』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다 대중적으로 이태원의 역사를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논문이 가진 학술적인 측면은 축소하고 인간 중심의 역사적 서술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태원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고유의 색을 잃지 않는 이태원이라는 이국적 공간, 그리고 그곳이 터전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태원이 언제부터 어떻게 이국적인 공간이 되었고 이국성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해 그려볼 생각입니다.


이태원의 새로운 가족 


1980년대에 들어 이태원이 본격적으로 관광쇼핑지가 되면서 늘어나는 관광객을 감당할 수 없었던 기존의 상인들은 판매원을 고용함으로써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고자 했다. 이는 1970년대 상권이 형성되던 시기에 유입된 상인들의 영어실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영어실력은 미군을 상대로 작은 규모로 장사를 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지만, 1980년대 이후 이태원에 유입된 큰 규모로 물건을 구매해가는 관광객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했다. 그 외에도 매년 20~30%씩 늘어나는 관광객의 수를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기존의 상인들은 종업원을 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 온 사람들이 바로 ‘세일즈’였다. 이들은 이태원에 새로 유입된 상인 집단으로 이전 시대와의 구분을 만드는 동시에 새로운 이태원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주체가 된다.     

 

이전 세대에 온 사람들은 영어도 잘 모르고 기지촌이라니까 온 사람들이라 그냥 주먹구구식으로 와서 손짓 발짓으로 장사하던 사람들이라 자리를 잘 못 잡았는데 우리 세대는 베이비붐 세대라 부모들이 교육열이 제일 쎌 때 큰 애들이라 사람들이 교육을 많이 받았다고, 그때 중고등 학교 나오면 대화는 할 수 있을 정도지 그때는 뭐 상고 공고도 없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영어를 꽤 하는 사람들이 여기 온 거지 58-60년생이. 
오형수, 남, 62세


글쎄 우리 아저씨는 나 시집오기 전부터 여기 있었으니까, 원래 영어를 잘했지. 나도 예전에 빅토리타운 일할 때 다 미국 사람이어서 물건 팔 수 있을 정도로는 했고.. 00이네 아저씨도 영어 되게 잘해, 그래도 여기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다들 영어랑 일본어는 기본적으로 할 걸.                                                       
서영인, 여, 57세

  

1980년대 초 이태원에 유입된 세일즈의 가장 큰 특징은 영어를 잘한다는 점이었다. 1970년대 상인들이 부대의 이전으로 자리를 잡거나 친척과 지인을 통해 이태원에 유입되어 영어를 못 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1980년대에 들어온 세일즈는 반대로 자신의 영어능력을 활용하기 위해 주체적으로 선택해 이태원에 들어온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다양한 배경을 가졌지만, 영어로 소통할 수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현재와 비교했을 때 당시 이들의 영어실력이 그리 뛰어났다고는 말하기 어려울지 모르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 봤을 때 외국인과 어울리며 판매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어실력은 충분히 가치 있는 능력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에 50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았다는 것을 보면 당시 이들의 능력이 지녔던 가치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세일즈들은 이러한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이태원 의류상권을 활성화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      



 매일경제 | 1981.10.06.  "올림픽 經濟學(경제학) <5> 觀光(관광)"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 관광객의 가장 큰 애로 사항의 하나는 언어의 장벽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올림픽 기간 중 이 문제는 각별히 중점을 두어 타개해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외국인에 대한 친절한 서비스는 말이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



위의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88올림픽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국가가 겪었던 문제 중 가장 큰 부분이 바로 소통의 문제였다는 점을 생각해 봤을 때, 이태원의 세일즈가 가진 영어 실력이 이태원이 관광쇼핑지로 선정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듯하다. 올림픽을 준비하던 국가가 선정한 쇼핑지 중에는 남대문이나 동대문 등 다른 지역도 있었지만, 이들은 주로 한국인을 상대하던 상권이었다는 점에서 관광쇼핑지가 되기에는 소통 측면에서 부족함이 있었다. 반면 이태원은 미군을 상대했다는 오랜 역사와 함께 1980년대 초 유입된 세일즈를 통해 소통의 문제가 해결된 상태였다. 그렇게 이태원은 독보적인 관광쇼핑지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비록 세일즈의 존재가 이태원이 관광쇼핑지로 선정되는 데 영향을 준 유일한 요소라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1980년대 초 시작된 발전 과정에서 이들의 유입이 큰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해 보인다. 실제로 아래의 기사를 보면 1983년 ASTA 총회 이후 이태원의 가치가 증명됨으로써 국가에서도 이태원을 적극 밀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매일경제 | 1985.10.11 "IBRD·IMF 特需(특수무산 맞춤 양복업계 "부푼 꿈"깨져"


...대부분 조합원업체가 몰려있는 명동. 소공동 등 중심가의 양복점들은 이번 국제회의를 계기로 세계수준의 양복기술을 자랑해보려고 잔뜩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외국인들을 이태원 등 특정상가로만 안내하는 바람에 부풀었던 기대만큼이나 실망이 크다고...     


우리 세대에 들어온 애들은 먹물 든 애들이었거든 대학 나온 애들도 있고, 거의 다 고등학교는 나온 애들이라고, 그래서 자리를 빨리 잡았지 이전 세대에 온 사람들 보다. 우리는 고급 인력이지 엘리트라고. 여기 연대 고대 나온 애들도 많았어. 무역한다고 이런 애들은 영어를 잘 하니까 주문장 같은 거 번역해주고.             
오형수, 남, 62세     


 그러나 이태원과 세일즈들이 갖는 관계는 일방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태원이 세일즈를 통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처럼, 세일즈들 또한 급격히 성장하는 이태원의 변화에 힘입어 빠르게 지역에 정착할 수 있었다. 1980년대 초 세일즈로 들어온 사람들은 평균 2년에서 3년 정도의 세일즈 기간을 거친 후 자신의 가게를 내고는 했다. 당시 대기업과 비교했을 때도 매우 높은 수준이었던 세일즈의 월급과 기회의 땅이라고 불리었던 이태원의 월세가 10만 원 정도였다는 것을 생각해 봤을 때(매일경제 1985. 10.16.), 이들이 2-3년 안에 자리 잡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러한 환경의 이점을 따르는 동시에 충분한 영어 실력을 갖추고 있던 세일즈들은 1970년대에 들어온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빠르게 자리를 잡는 것이 가능했다. 1970년대 인맥을 통해 유입된 상인들이 가족 사업을 벌였던 것과 달리, 이들은 인맥 없이 들어와 이른 시일 내에 독립해 나갔다는 점에서 이전 시대의 상인들과 차이를 보였다. 


처음 왔을 때는 우리가 선배들 영어 통역해줘서 개시할 때 20-30개씩 팔아주고 그랬다고…. 그때 식당으로 통역하러 많이도 불려갔는데, 왜 외국 사람들은 닭고기, 소고기 안 먹는 사람들이 있잖아.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와서 그런 거 들어갔냐고 묻는데 못 알아들으니까 급하게 와가지고는 뭐라는 거냐고 예전에 여기 아리랑식당 있을 때 많이 불려갔지.                                                      
오형수, 남, 62세


급증하는 관광객 덕분에 이태원 안에서 세일즈를 필요로 하는 영역은 점차 늘어났다. 의류상권 외에도 이곳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인근의 상업 공간 또한 늘어나는 외국인을 상대하기 위해 세일즈의 영어 실력이 필요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의류상권 주변으로 골목마다 틈틈이 자리했던 한식당들이었다. 의류상권 주변의 식당들은 관광객이 오기 전에는 주로 늘어난 가내공장의 기술자를 상대로 영업을 하던 곳이었기 때문에 영어능력이 필요치 않았지만, 1980년대에 들어 이태원에 관광객이 늘자 이런 식당에도 관광객의 방문이 잦아지면서 세일즈의 영어 실력이 필요해졌다. 이런 식으로 세일즈의 영어능력은 이태원 내에서도 특별한 능력으로 여겨졌고 세일즈들은 변화하는 이태원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어갔다.


1980년대 초 이태원에서 가졌던 영향력 때문인지 세일즈들은 자신이 가진 영어 실력에 자부심을 갖고 있기도 했다. 특히 여러 업종 중 양복점에 들어온 세일즈들은 스스로가 가진 영어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컸는데, 이는 양복이라는 맞춤옷 판매가 갖는 특수성 때문이었다. 기술공으로 이태원에 들어온 1970년대의 상인들과 달리 1980년대에 양복점에 들어온 세일즈들은 손님을 상대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 들어왔다는 점에서 외국인 손님과 소통할 만한 영어 실력이 필요했다. 특히 양복과 같은 맞춤옷의 경우 크기를 재단하고 외국인 손님의 여행일정을 맞춰서 제작해야 했기 때문에 단순히 판매만 하는 업종보다는 긴 대화가 필요했다. 따라서 이러한 맞춤옷을 판매하는 세일즈들은 외국인과 비교적 긴 시간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영어 실력을 갖췄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꼈다.


이 시기에 형성된 세일즈 문화는 1980년대 초반에 들어온 세일즈들이 독립하여 자신의 가게를 갖게 된 이후에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현재 상인들이 세일즈 문화가 사라진 것이 이태원 의류상권이 쇠퇴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말할 정도로 세일즈는 이태원 의류상권 안에서 큰 존재감을 가졌다. 이러한 세일즈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가게를 열기 위해 들어오는 사람보다는 영업을 배우고자 하는 젊은 사람들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이미 초기에 들어온 세일즈들은 자리를 잡은 후였고, 이들이 새로운 세대의 세일즈를 뽑는 형태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음 세대에 들어온 사람들이 이전처럼 자리를 잡는 것은 힘들 수밖에 없었다. 이태원 의류상권은 이미 성장을 멈췄고, 새로운 사람을 위한 자리는 남아 있지 않았다. 



 동아일보 | 1989.04.13 "이태원상가의 호객행위 불쾌 외국인 관광명소 모범 보여야"


이태원에 물건을 사러 나가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발자국을 떼기가 무섭게 달려들어 호객행위를 하는 상인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 내가 알고 지내는 외국인 친지는 이태원의 옷이 품질과 가격 면에서 매우 좋다고 여기면서도 이태원시장에서 빈번히 겪어야 하는 호객 행위 때문에 이태원시장을 자주 찾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인지 2세대 이후의 세일즈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태원 의류상권의 단점으로 뽑히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태원 의류상권이 성장할수록 관광객이 늘어남과 동시에 이곳에서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도 많아지고 경쟁도 치열해졌기 때문이었다. 상점의 수가 점점 더 늘어나 이제는 대로변 큰길뿐만 아니라 안쪽 골목까지도 상점으로 가득 차게 되었지만 관광객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경쟁도 없고 욕심도 필요 없었던 이태원 의류상권에도 경쟁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던 부분이 바로 세일즈들의 호객행위였다. 위의 기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특히 골목에 위치한 가게일수록 세일즈의 역할은 중요했다. 진열을 통해 관광객에게 직접 물건을 보여줄 수 있었던 대로변의 상점과 달리 골목에 있던 상점은 세일즈의 호객행위를 통해서야만 손님이 물건을 보러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세일즈의 호객행위는 점차 과해지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관광객이 불편을 느끼게 하는 요소로 변화하게 된다. 1980년대 초 들어온 세일즈 덕분에 상권은 계속 커졌지만 모순되게도 상권이 커지면 커질수록 이런 세일즈의 존재는 상권의 단점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처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역에서 세일즈가 자체가 갖는 역할과 영향력은 달라졌지만, 세일즈의 언어능력은 이태원의 한국인 상인과 외국인 손님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 맺음 양상을 만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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