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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 Oct 12. 2020

맞춤옷과 짝퉁 천국

이태원의 역사_12

이 글은 필자의 석사 논문인 『문화적 엔클레이브 이태원의 한국인 상인들』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다 대중적으로 이태원의 역사를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논문이 가진 학술적인 측면은 축소하고 인간 중심의 역사적 서술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태원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고유의 색을 잃지 않는 이태원이라는 이국적 공간, 그리고 그곳이 터전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태원이 언제부터 어떻게 이국적인 공간이 되었고 이국성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해 그려볼 생각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한국은 몰라도 이태원은 안다고 할 정도로 이태원이 유명했지! 
 이동석, 남, 64세     


동아일보 | 1988.05.17.

"국제화 시대의 한국 특별기획 (15) 이색쇼핑 세계적 타운 이태원"

... 이태원이 먹고 마시고 노는 곳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국제적인 쇼핑타운 이라는 평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나름대로의 상술과 강점을 길러왔기 때문. 

...

내국인에게 주는 이태원의 이미지는 외국인들에 비해 더욱 이국적인 느낌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태원의 반쪽, 유흥업소가 아닌 쇼핑타운은 여전히 내국인에게도 긍정적인 매력을 주고 있다.



88올림픽이 다가왔을 때 이태원 의류상권은 완연한 변화를 끝낸 상태였고, 서울올림픽이 시작하자 이태원은 말 그대로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88올림픽을 기점으로 시작 된 황금기는 이태원 의류상권만이 아닌 이태원 전반에 호황을 가져왔다. 하물며 약국마저도 그날 번 돈을 셀 수도 없을 만큼 관광객이 넘쳐났다고 한다. 마치 1970년대 미군부대가 용산에 주둔하게 된 이후 이태원 사람들의 삶이 미군에 의지해 살아가게 된 것처럼, 1988년 이후의 이태원은 관광객에 의지해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는 이태원이 이제 ‘미군’ 보다는 ‘국제’ 혹은 ‘관광지’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공간으로 변모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상인들 또한 ‘국제도시’라는 단어를 통해 이태원을 표현했고 활용했다. 여전히 이태원은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공간이었지만, 이제 이태원이 표현하는 문화적 차이는 유흥지대가 아닌 ‘쇼핑’과 ‘관광객’이라는 요소를 통해 드러났다. 


이태원이 갖게 된 새로운 이미지 였던 ‘국제화’는 주류상품의 변화에서도 드러났다. 특히 상인들의 기억 속에 남은 양복과 같은 맞춤옷과 짝퉁의 판매 경험은 이태원 의류상권이 확연히 미군만 상대하던 시기와는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맞춤 상품은 이전과 달리 양복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제 이태원에서는 가죽 신발, 가죽 의류 등 또한 맞춤으로 제작할 수 있었다. 다양한 맞춤옷이 인기를 얻어 가자 이태원 의류시장은 짧은 기간 머무는 관광객이 대량의 맞춤옷을 구매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과거 상점 안에 재봉틀을 두고 작업하던 방식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이제는 관광객이 한국에 도착하는 날 물건을 주문하고 떠나는 날을 알려주면 각 의류상가와 연계한 인근의 가내공장이 기한에 맞춰 물건을 제작해 손님이 떠나기 전 물건을 전해줄 수 있었다. 상점과 공장은 분리되었고, 화려한 이태원의 지하에는 밤새도록 미싱이 돌아갔다. 이태원 이곳저곳에 분포하게된 수많은 가내공장 덕분에 어떤 제품이던 짧은 기간 안에 제작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처럼 맞춤옷의 종류가 다양해졌다는 사실은 이를 찾는 고객 또한 다양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러시아 사람들 한창 부산에 배 대놓고 초코파이 실어갈 때 오면 언제 가는지 손짓 발짓으로 묻고 그랬지, 말이 안 돼도 그냥 달력 보면서 비행기 날아가는 흉내 내면서 슈웅 이렇게 언제 가냐고 묻고 그렇게 소통했지 뭐.         
오형수, 남, 62세     


그러다가 90년대 초에는 러시아랑 수교하면서 러시아 사람이 한창 많이 들어 올 때가 있었지. 이 사람들이 한동안 가죽 사러 많이 왔어, 그러다 이제 규모가 커지니까 도매 쪽으로 넘어가서 동대문 쪽으로 가게 된 거지.  
이동석, 남, 64세


특히 1980년대 이후 이태원을 찾게 된 관광객 중에서도 러시아인과의 경험은 이태원의 다양성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로 유독 의류상인들의 기억에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러시아 관광객에 대한 기억은 양복, 가죽, 가방 가릴 것 없이 여러 의류상인에게 기억되고 있었는데, 이는 가까운 거리 덕분에 비교적 러시아 관광객이 방문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러시아 관광객과의 기억은 미군이 아닌 주체들이 이태원의 이국성을 생산해내고 있었음을 보여줌은 물론이고,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이 증가함에 따라 상인들이 외교 관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음을 보여줌으로써 이태원의 변화만큼이나 의류상인의 삶 자체도 이전보다 국제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과거 미군만이 고객이던 시절 이태원 의류상인들이 신경 써야 할 상황은 오직 미군부대 내의 상황이었다. 종종 미군부대 내에서 사건이 터지거나, 부대 밖에서 미군들이 사고를 치는 등의 사건이 발생하면 외출금지 명령이 내려져 이태원 상권이 전반적으로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의류시장이 관광쇼핑지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전보다 많은 것들에 신경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러시아와의 수교가 러시아 관광객의 방문을 증가시켰던 것처럼, 각 국가와의 외교 관계는 상권을 방문하는 고객에 변화를 주거나 거래 과정에 변화를 주는 등 영향을 미쳤다. 상인들의 관심은 더 이상 한국 안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이제 의류상인들은 수익과 직결되는 문제로서 외교 관계나 환율문제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게 되었다.  

    

가서 오더를 받아오면 붙여주고 내가 직접 가기도 하고, 배송비가 비싸니까 직접 가서 가져다주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근데 이것도 나라 관계가 안 좋으면 물을 먹어요. 막말로다가 사이가 좋을 때는 다 눈감아주고 그냥 넘어가는 게 사이가 안 좋으면 괜히 꼬투리를 잡는다고 여기 그렇게 당한 사람이 여럿 있어. 
오형수 남, 62세     


특히 일본의 경우 다른 어떤 국가들보다 거래량이 많았다는 점에서 일본과의 관계는 상인들에게는 중요한 문제로 여겨졌다. 통계상 한국을 방문하는 전체 관광객 중 일본인의 비중은 1988년도 이전에도 큰 편이었지만, 이들이 이태원에 유입된 것은 1980년대 이후였다. 이는 기존에 이태원이 강하게 표현했던 미군과 관련된 정체성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미군과 일본의 역사를 생각했을 때 이해가 될 만한 지점이다. 미군의 색채가 진했던 이태원이 1980년대에 들어 관광지화되면서 그 성격이 변해가자 일본인의 유입은 급격히 늘어갔고, 이들의 존재감 또한 이태원에서 급격하게 성장하게 된다. 


당시 일본인 관광객이 주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짝퉁 제품이었다. 짝퉁은 1970년대 후반 보세옷의 짝퉁에서 시작해 1980년대가 되면 명품 신발, 가방, 시계 등 다양한 제품들로 발전해 이태원을 대표하는 상품으로 자리한다. 이러한 짝퉁의 경우 1980년대 초부터 국제 행사를 준비하던 정부가 국격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단속해 왔지만, 1990년대까지도 꾸준히 증가하며 규모를 확장해갔던 가내공장들을 보았을 때 정부의 단속과 반대로 짝퉁은 시간이 지날수록 활성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인 관광객은 이러한 짝퉁을 소비했던 주체 중 가장 비중이 큰 집단으로 이들은 2000년대 초까지도 이태원에서 짝퉁과 같은 가죽 제품을 소비하며 이태원 의류상권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하게 된다. 이는 이태원이 일반적으로 서양권 문화와 연관되어 생각되는 것과 달리 상인들에게는 일본인 손님의 존재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되었다. 실제로 이태원 거리를 거닐며 간판을 자세히 살펴보면 영어만큼이나 일본어 또한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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