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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 Oct 16. 2020

국제도시 이태원의 작은 무역상

이태원의 역사_13

이 글은 필자의 석사 논문인 『문화적 엔클레이브 이태원의 한국인 상인들』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다 대중적으로 이태원의 역사를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논문이 가진 학술적인 측면은 축소하고 인간 중심의 역사적 서술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태원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고유의 색을 잃지 않는 이태원이라는 이국적 공간, 그리고 그곳이 터전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태원이 언제부터 어떻게 이국적인 공간이 되었고 이국성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해 그려볼 생각입니다.

  

의류상권의 발전과정을 통해 이태원이 갖게 된 ‘국제화’라는 새로운 특성은 비단 공간의 구성원과 제품의 변화만으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태원의 변화는 이태원의 주민이자 의류상권의 상인으로 살아가던 한국인 상인의 삶 속에서도 드러났다. 이는 일종의 세대교체를 통해 이뤄진 것으로, 세일즈로 들어온 1980년대의 의류상인들은 미군에 의지하던 시절의 의류상인과는 다른 행동 양상을 가짐으로써 이태원의 변화가 이들의 삶에도 ‘국제화’를 가져왔음을 보여준다.


그때 당시에 우리끼리 공부도 많이 했다고, 영어니, 일본어니 우리는 깨어진 상태로 왔기 때문에 그렇게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많이 했지. 그래서 같이 외국도 시장조사 다녀오고 그런 거지. 우리 세대에는 3개 국어 정도는 다 했지 영어랑 일본어는 기본이고, 프랑스어 독일어도 좀 하고 똑똑한 애들은 4-5개 국어씩 했다고 보면 돼. 
오형수, 남, 62세


일본어는 잠시 고향에 갔다가 돌아오고 나서 배우기 시작했어. 나는 할 줄 몰랐는데 다른 사람들은 일본어는 여기 다찌 문화가 있어서 그래도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았어 그래도.
서영인, 여, 57세


1980년대에 세일즈로 유입된 상인들은 기본적으로 영어를 할 줄 아는 상태로 이태원에 들어왔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1970년대에 이주해 온 사람들과 달리 언어능력을 기반으로 하여 주체적으로 이태원에 들어왔던 이들은 변화하는 이태원에 맞춰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데도 열정을 아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태원 의류상권이 미군만을 위한 공간에서 벗어나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이 방문하는 공간이 되자 새로운 고객층에 맞춰 이들도 새로운 언어를 배움으로써 변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이태원 상인의 삶이 보다 국제화 되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거래 양식 또한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다. 



동아일보 | 1996.09.03

    

미국에 의류를 수출하는 마이티숍의 직원 임정희씨는 작년에는 5천벌을 미국에 수출했으나 올해는 주문이 8백 벌밖에 안 된다.



예전에 지지강 골목에 하버드양복점이라고 있었어. 그분이 영어를 잘했는데, 그 재단사랑은 못했는데 그 사장님만 잘하셨어, 체격도 미국인들이랑 비슷했고. 그 아저씨는 미국으로 가서 주문받아오고 그래서 돈 많이 벌었어.                  
최지은, 여, 58세     

  

1970년대 후반부터 이미 보따리상이 등장할 정도로 이태원 의류상권에는 외국인 관광객의 1회 소비량이 증가했고 언어능력을 갖춘 상인의 등장으로 인해 거래규모는 한층 더 커지게 된다. 1980년대 이후 의류상권의 주력상품이 된 맞춤옷과 짝퉁은 보세제품보다 단가가 높은 제품이었던 데다, 상인들의 언어 능력을 통해 작은 규모이지만 수출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거래가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의 상인들은 이태원 안에서 이뤄지는 거래에 만족하지 않고 마치 작은 무역상이 된 것처럼 직접 해외로 나가 사업의 규모를 키워나갔다. 여전히 상점을 기반으로 이태원 내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이태원을 찾은 외국인들에게 대량으로 주문을 받아 물건을 각 국가로 배송해주거나 직접 해외에 가서 주문을 받아와 보내주는 형태의 거래양식이 이태원에 새롭게 형성되었다. 



동아일보 | 1988.01.08 "()에 외국인들 울상"


예년 같으면 월평균 1백 50명 안팎의 외국인 관광객이 찾아와 옷을 맞췄으나 최근에는 비수기까지 겹쳐 50명 선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 … 한편 엔화 강세의 영향으로 일본인 관광객 수는 최근 눈에 띄게 늘어 이태원 상가 상우회 측은 예년 전체의 10%에도 못 미치던 일본인 관광객이 올해는 부쩍 늘어 30% 수준까지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1988년 이후 의류상인들이 일종의 작은 규모의 무역업을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거래가 이루어진 곳은 바로 일본이었다. 1980년대 버블을 겪었던 일본인들은 환율 등의 이점 덕분에 이태원을 많이 찾게 되는데, 이러한 일본인 손님 중에는 개인으로 관광을 오는 사람만큼이나 1980년대 초반 승무원들처럼 보따리상으로서 이태원에 오는 경우 또한 많았다. 이러한 일본인 보따리상은 과거의 보따리상과 차이를 보였는데, 과거 이태원 내부에서만 거래가 이뤄지던 방식에서 해외를 넘나드는 거래방식이 정착되자 상인들은 일본인과 보다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이는 다른 국가들보다 거리가 가까워 왕래가 비교적 쉬웠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이태원 의류상인과 일본인 보따리상은 서로 잦은 교류를 통해 일종의 상업적인 ‘파트너쉽partnership’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일본 관광객들이 제일 좋았지[많이 팔았다]. 예전에는 미국인들이 많이 오다가 일본인들이 주가 되었는데, 아무래도 한국 물가가 오르면서 관광객들이 한국에 갖는 메리트가 없어진 거 같아.                                                 
서호진, 남, 68세


일본은 일 년에 열댓 번도 더 갔지, 많이 갈 때는 한 달에 2~3번. 일본에서 유니폼이나 그런 것도 하고, 개수가 100개 미만인 거는 중국 같은 데서는 안 해주니까 여기서 하는 거지,                      
 오형수, 남, 62세


이러한 일본인과의 거래는 단순히 상업적인 관계로 끝나지 않았다. 지리적 이점이 가져다 준 잦은 교류는 이들의 관계를 상업적인 파트너쉽을 넘어 서로 안부를 묻는 등 사적인 관계로 발전시켰다. 일본인들은 상업적인 관계가 끝난 이후에도 이태원 의류상인들과 친구로 남아 서로 소식을 전하며 관계를 유지했다. 아래의 증언은 이를 잘 보여주는데, 온라인으로 소식을 주고받는 것은 물론 서로 선물을 보내거나 각 나라로 초대해 관광을 시켜주는 등의 방식으로 상인들은 현재까지도 외국인 손님들과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이를 가능하게 만든 가장 큰 요소는 상인들의 언어능력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만약 서로 자유롭게 소통을 할 수 없었다면 이런 식의 친밀한 관계는 맺어지지 못했을지 모른다. 이는 1970년대 상인과 미군의 사이에서는 쉽게 발견할 수 없었던 관계이기도 하다.


나는 한국 사람하고, 내국인 비즈니스를 해본 적이 없어요. 그전에는 일본사람들 미국사람들하고 상대를 하다가 지금에서야 한국 사람들하고 관계를 맺는 거지. 그래도 지금까지 전에 알고 지내던 외국인들하고는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고. 페북으로 그걸로 아직까지도 연락하고 그래.                                        
장태진, 남, 59세


이런 식의 친밀한 관계는 비단 일본인과만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이후 이태원으로 찾아온 한국에 거주하는 공관에 다니는 사람이나 주재원 그리고 사업차 한국에 정기적으로 방문하던 사람들 또한 하나의 단골로서 상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쌓았다. 특히 이러한 사람들을 단골로 둔 업종은 양복점이었는데, 상가가 형성되던 초기부터 존재해 왔던 양복점은 1980년대 여러 국제 행사를 맞이하며 각 국가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의 방문을 통해 명성을 높이게 되었고,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에게도 소문이 나며 이들을 단골로 만들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 손님은 미군 직원들이나 대사관 사람들 거래처로 한국 온 사람들이 소개받고 오는 거야. 일본 쪽도 예전부터 오던 사람은 아직 오지. 단골들이 있으니까 그런 사람들이 오는 거지.   
이동석, 남, 64세


인터넷에 쳐보면 나올 텐데 이전에 IOC 위원장 했던 자크 로게인가 맞나? 이 사람이 와가지고는 90개씩 양복을 해갔는데, 이스라엘 총리도 뭐 때문에 왔다가 우리 집에서 해갔지. 그때는 하도 그냥 부인이랑 둘이 와서 경호도 없이 그래서 못 알아봤는데 나중에 뉴스 보니까 그 사람이더라고, 그때는 뭐 근접경호도 없고 오더라고, 그때 그 사람이 신라호텔 묵었는데 내가 그때 신라호텔 23-24층을 처음 가봤잖아. 그냥 다 금장으로 돼 있는데 엄청나더라고. 나는 그런 거 처음 봤어. 가봉하러 갔는데 엄청나 아마 그게 94년인가 노태우 때쯤일 거야. 한 번 찾아봐.                              
  오형수, 남, 62세


이 시기에 생겨난 단골들의 계층적 지위가 높다는 사실은 1980년대 상인들이 보여주는 관계맺기의 또 다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주력 상품으로 등장한 맞춤옷과 짝퉁은 과거에는 다루지 않던 고가의 물건이었다. 특히 양복의 경우 비교적 싸고 질이 좋아 인기를 얻기는 했지만, 일반 의류보다는 가격이 높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찾는 고객 또한 한국 안에서도 대사관에서 일하거나 주재원으로 와있던 계층적 지위가 높은 외국인이 대부분이었는데, 상인들은 자신이 가진 언어능력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이처럼 높은 계층의 사람과 교류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단골뿐만 아니라 당시 이태원을 찾았던 외국인 손님 중에는 각 국가의 유명 인사가 많았는데, 이는 여러 양복점에 걸려있는 사진을 통해 현재까지도 이들과의 만남이 자랑으로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높은 계층적 지위를 가진 외국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 또한 1970년대 미군들을 중심으로 상대하던 의류상권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물론 과거에도 어느 정도 소통을 하기는 했지만 당시 상권은 미군에게 의지하며 작은 규모로 물건을 팔던 단기적이고 표면적인 관계였다면, 1980년대 이후에는 소통을 통해 더욱 장기적이고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 가능했다. 오히려 이 시기가 지나고 나면 과거 미군에 의지하던 삶을 잊은 듯, 한국인들 사이에서 미군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기도 한다. 이와 같이 1980년대 상인들이 외국인 손님과 보여주는 관계맺기 양상은 일방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이태원에 있는 한국인과 외국인의 관계가 비교적 동등한 느낌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상인들은 이제 파트너 혹은 친구로서 외국인과의 관계를 맺었고, 이는 1970년대까지 이태원의 한국인들이 미군에게 보이던 절대적인 의지와는 분명 다른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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