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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 Oct 20. 2020

황금기의 끝자락

이태원의 역사_14

이 글은 필자의 석사 논문인 『문화적 엔클레이브 이태원의 한국인 상인들』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다 대중적으로 이태원의 역사를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논문이 가진 학술적인 측면은 축소하고 인간 중심의 역사적 서술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태원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고유의 색을 잃지 않는 이태원이라는 이국적 공간, 그리고 그곳이 터전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태원이 언제부터 어떻게 이국적인 공간이 되었고 이국성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해 그려볼 생각입니다.


매일경제 | 1990.02.14


이태원 의류상권은 외부적으로 88올림픽을 기점으로 절정을 찍고 1990년대를 지나며 불경기를 겪었다고 판단되었다. 당시 많은 언론보도가 이태원의 불경기를 거론했으며 1988년 이후 급격하게 오른 인건비와 자재비로 인한 가격 경쟁력 하락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재밌는 점은 언론이 1990년대 이태원 읠상권의 불경기를 걱정하고 있는 동안 정작 상인들은 크게 불황을 겪고 있다고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수치로 봤을 때 관광객이 줄어들고 사업의 규모가 줄어들어 실제로 불경기를 겪게 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으나 적어도 상인들은 이런 불경기를 체감하지 못했다.           


우리 딸 낳았을 때가..92년이니까 그때는 여기 아니고 이태원시장 쪽에 가게가 있었는데, 그때 생각해보면 유모차 끌고 가게 다니고 했는데 그때도 사람 많았어. 장사 안되지 않았어. 그러고 나서 4년 동안 고향 갔다 왔는데 그때도 잘됐고. 
서영인, 여, 57세


IMF 때 다른 데는 다 안됐는데 이태원은 잘됐어. 근데 외국인 상대 장사들은 잘됐는데, 그때 스키복 장사들이 다 망했잖아. 97년 이전에 여기에 한국인들은 스키복이 유행했는데, 그때 장사가 엄청 잘 돼서 창고에 1억씩 물건 쟁여놨는데 한국인들이 돈을 안 써서 다 망한 거지.                                              
황서연, 여, 56세


97년에는 여기가 특수지역이라 다른 데보다 좀 잘 됐던 거지 88년에 비하면 잘 된 것도 아니지. 환율 때문에 외국 사람들이 하나 살 거 두 개 사고 그래서 다른 데보다 나쁘지 않았던 거지 잘 된 거라고 할 수는 없지. 
이동석, 남, 64세


심지어 위의 증언에서 볼 수 있듯이 상인들은 1997년 IMF를 겼었을 당시 오히려 환율차로 인해 다른 지역에 비해 호황을 겪었다고 기억하기도 한다. 실질적인 수익의 면에서는 차이가 있었을지 모르나 기존에 하나를 살 수 있던 가격으로 두 개를 살 수 있게 되니 관광객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고 상인들은 장사가 잘됐다고 기억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의류상권의 경우 당시 짝퉁 단속의 강화로 인해 표면적으로는 쇠락해 가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단속을 피해 상점들이 골목 안쪽이나 지하로 들어가 판매를 지속적했기 때문에 수익에는 크게 지장을 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초반 까지도 이태원에 즐비해 있던 짝퉁 공장의 존재는 여전히 이곳에서 짝퉁이 성행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당시 이태원 의류상권의 경기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데 반해 1990년대 이후 소방서 인근의 유흥업소들이 쇠락을 맞이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1980년대 이후 강남지역의 유흥업소가 발달하기 시작했고, 1990년 “범죄와의 전쟁”이 시작되며 이태원의 유흥업소들이 타격을 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1992년에는 실제로 27개 업소가 강제로 폐쇄되었으며, 이외에도 자진 폐업을 하고 의류업으로 전환하는 경우까지 생겨났다(최종일 2003 :39). 


1990년 말 찾아온 유흥지대의 쇠락은 단순히 한 상권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이태원이 초기 미군을 통해 갖게 된 문화적 특성을 표현하던 공간이 쇠락해가고 있음을 의미했다. 실제로 유흥지대의 쇠락은 1990년대 말 미군과 생활을 통해 초기의 문화적 이질성을 경험했던 이들이 이태원을 떠나는 시기와도 맞물리면서 과거의 특성을 지워가는 듯 보였다. 어쩌면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이태원은 다른 기지촌들과 마찬가지로 주류사회와 구분되는 문화적 이질성 그 자체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태원을 떠나는 이들의 빈자리는 다른 이들에 의해 채워졌고, 그들은 사라져가는 것들을 발판삼아 새로운 문화적 이질성을 형성해 냈다. 과거의 모습 그대로는 아니지만 이태원은 조금씩 변화하며 이국적인 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참고문헌 

최종일 2003, “이태원 공간에 나타난 ‘아메리카나이제이션(Americanization)’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석사학위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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