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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 Oct 28. 2020

밀레니엄의 도래와 이태원의 새로운 ‘다문화’

이태원의 역사_15

이 글은 필자의 석사 논문인 『문화적 엔클레이브 이태원의 한국인 상인들』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다 대중적으로 이태원의 역사를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논문이 가진 학술적인 측면은 축소하고 인간 중심의 역사적 서술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태원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고유의 색을 잃지 않는 이태원이라는 이국적 공간, 그리고 그곳이 터전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태원이 언제부터 어떻게 이국적인 공간이 되었고 이국성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해 그려볼 생각입니다.


1950년대 용산에 미군이 주둔하게 된 이후, 이태원은 한국 안의 이국적인 공간으로 존재해 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이질성의 성격은 꾸준히 변해 왔으나 한국의 여타지역과 구분되는 경계는 흐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이태원은 또 한 번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변화한 한국의 사정은 더 이상 이태원이 외국인 관광객을 중심으로 재생산해내던 특성을 유지할 수 없게 했지만, 앞선 시기의 변화가 그러했듯 기존의 특성이 사라지는 것이 이태원의 이국성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태원의 한 역사가 저물어 가던 2000년대, 이태원의 또 다른 한편은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다문화의 형성 배경

 

1980년대 이태원 의류상권이 제조업을 기반으로 급격한 성장을 맛보았던 것처럼, 한국 전반의 경제 또한 88올림픽 이후 빠르게 성장하며 국가 경쟁력을 높여가고 있었다. 비록 1997년 경제위기를 경험하기는 했지만, 2000년대에 들어선 한국은 더 이상 개발도상국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력 상승은 이태원의 입장에서는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국가의 경제력 상승으로 인해 환율차가 줄어들고 인건비가 상승했던 탓에 이태원 의류상권이 더 이상 외국인 관광객에게 싼 가격에 좋은 품질을 가진 물건을 선보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서서히 진행되었지만 분명하게 외국인 관광객의 소비를 감소시키고 있었다. 이와 함께 이태원 의류상권은 한국 내부에서도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서울 안에 이태원과 경쟁할만한 관광쇼핑지가 꾸준히 발전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동대문시장의 발전은 이태원 의류상권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었다는 점에서 주목해 볼 만하다.     

  

동아일보 | 1998.08.29.  “국내 최대 패션전문매장 '밀리오레'동대문에 개장”

1990년대 말 동대문에는 ‘밀리오레’와 ‘두타’ 같은 대형 쇼핑센터가 들어섰다. 이로 인해 이태원 의류상권은 관광객을 빼앗기게 되었는데, 이는 더 이상 이태원이 가졌던 장점이 관광객에게 큰 매력요소로 다가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태원을 독보적인 관광쇼핑지로 만들었던 상인들의 언어능력은 2000년대에 들어서는 그리 특별한 능력으로 여겨지지 못했고, 동대문시장의 도매시스템을 이태원의 가내공장 시스템이 이겨내는 것은 역부족이었다(김은실 2004: 37). 과거와 달리 다양한 매체를 통해 외국문화가 한국 전반에 알려져 있었고, 한국인의 전반적인 영어 수준 또한 상승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존의 도매시장 시스템을 바탕으로 세련된 외관을 갖게 된 동대문시장으로 관광객이 발길을 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동대문시장은 더 이상 외국인 관광객에게 어려운 공간이 아니었다. 이전에는 허름하고 복잡한 골목 때문에 언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인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공간이었다면, 이제 깔끔한 외관을 바탕으로 저렴한 물건을 살 수 있는 동대문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었다. 특히 이러한 장점은 1990년대 한국을 방문하던 일본인 보따리상의 눈길을 끌면서 이태원을 방문하던 보따리상의 발길 또한 돌리게 했다. 물론 현재까지는 일본인과 상인들이 맺었던 친밀한 관계 덕분에 종종 단골들이 들르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동대문 시장의 발전이 관광객을 분산시킴으로써 이태원의 의류상권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번영을 누릴 수 없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이태원이야 뭐 이제.. 동대문도 생겼고 하니까 밀리는 거지.        
서영인, 여, 57세


외국인 관광객은 이제 다 끝난 거지. 이제 동대문 남대문으로 가버리고 누가 와. 아무래도 거기가 물건도 다양하고 볼 것도 더 많으니까, 예전에는 이태원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외국인이면 거기가 낫겠지.           -
서호진, 남, 68세     

  

이러한 동대문시장의 개발은 실질적으로 이태원 의류상권 쇠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봐도 무방한 만큼 이태원 의류상인들의 인식 속에도 인상 깊게 기억되고 있었다. 주목할 점은 동대문 쇼핑몰의 발전이 단순히 이태원에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동대문시장의 발전으로 인해 이태원 의류시장이 쇠락해 가게 되었다는 것은 의류상권이 표현하던 국제화된 특성 또한 사라질 수밖에 없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대문시장의 발전은 이태원 내부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과 맞물리며 이태원에 변화를 불러왔다. 동대문시장의 발전이 의류상권의 쇠락과 연관된 사건이었다면, 2000년대 전후 이태원에서 일어난 내부적인 사건들은 이태원의 새로운 공간을 탄생시키는 데 영향을 줌으로써 이태원이 변화하는 배경이 된다. 

  

이태원에 새로운 공간을 탄생하는 데 영향을 준 첫 번째 사건은 앞서 살펴본 바 있는 관광특구지정과 관련이 있다. 1997년 이태원이 관광특구로 지정된 사건은 이를 주도했던 유흥업계의 활성화는 가져오지 못했지만, 이는 서울시에서  1995년 시행한 “이태원로 지구단위계획”의 방향이 구체화하는 계기가 되어 이태원 전반에 영향을 줄 새로운 공간을 탄생시킬 발판이 된다. 아래의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1997년 관광특구로 지정됨으로서 이태원은 2000년대에 들어 다시 한번 개발의 대상이 된다. 2000년대에 들어 구체화된 지구단위계획의 중점은 기존의 쇼핑과 유흥 중심의 관광지로서의 이태원을 음식과 숙박시설까지 고루 갖춰 보다 완성도 있는 관광지로 만드는 데 있었다.   


경향신문 | 1997.08.20. “이태원 일대 구역별 특화개발 용산구, 관광특구 중·장기계획 확정”

매일경제 | 2001.05.28

"이태원에 '먹거리 골목조성"

서울 이태원에 세계적인 먹거리 골목이 들어서는 등 외국인을 위한 관광특구로 본격 개발된다. ... 시는 이에 따라 이태원에 소재하고 있는 각국의 유명 음식점을 발굴·육성해 홍보하며 특히 해밀턴호텔에서 보광동 쪽으로 넘어가는 이화시장 일대를 각국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푸드 코트(Food Court)로 조성해 세계인의 먹거리 골목이 되도록 추진할 계획이다.     


이러한 방향성은 관광특구가 지정될 당시의 신문기사에도 드러난다. 위의 기사에 나와 있는 계획도를 보면 관광특구로서 이태원에 새로이 식당가와 광장, 숙박시설 등을 유치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계획에 맞춰 가듯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태원에는 실제로 세계음식거리가 형성된다. 이러한 세계음식거리는 소방서 인근의 이화시장 일대가 아닌 해밀턴호텔 뒤편에 생기게 된다는 점에서 초기 계획과는 달랐지만, 중요한 점은 2000년대 초 이미 관광특구지정으로 인해 세계음식거리라는 이태원의 새로운 특성을 보여주는 공간이 창출될 가능성이 형성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이태원에 영향을 준 사건은 지하철 개통이었다. 1980년대 의류상권이 발달하면서 이태원은 내국인 사이에서도 쇼핑명소로 알려졌지만, 교통이 편리한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1990년대까지 이태원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외국인 관광객이었다. 관광객의 경우 관광버스로 실어다 주고 실어 갔기 때문에 지하철과 상관없이 편리하게 이태원에 드나들 수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된 지하철 공사가 2000년에 끝나면서 마침내 2001년 이태원역이 개통되었고, 이는 한국인의 이태원 방문을 보다 용이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의류상인들은 외국인 관광객을 주요 고객으로 여겼기 때문에 지하철의 개통을 인상 깊게 기억하지 못했다.


지하철 처음 생겼을 때는 별로 다를 게 없었는데. 한창 외국인들이 올 때고 한국인들 오는 데가 아니었으니까, 뭐 차 없는 젊은 사람들(한국인) 오기 편해진 거지, 쇼핑하는 것하고는 크게 상관이 없었어.                            
서호진, 남, 68세


당시 의류상인들은 지하철의 개통이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이 이태원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했다. 마치 1980년대에 미군의 빈자리를 외국인 관광객이 채워가며 새로운 풍경이 만들어진 것처럼, 지하철의 개통은 외국인 관광객의 빈자리를 한국인이 대체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2000년대만의 풍경을 만들어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하철을 통해 이태원을 방문하게 된 한국인들은 이후 ‘세계음식거리’의 주요 고객이 되어 지역의 새로운 특성을 만들게 될 세계음식거리를 발전시키고 지역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 일조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태원의 변화에 영향을 준 내부적인 사건은 용산 미군기지의 이전이다. 1989년부터 말이 나왔던 용산의 미군기지 이전계획은 1990년대에 잠시 무산이 되었다가 2003년 한미회담을 통해 재기되었다. 비록 용산기지의 이전은 2003년 확정된 이후 2017년에야 마무리가 된다. 하지만 이미 미군기지의 이전이 결정된 순간부터 이태원이 이로 인해 변화할 것임은 자명했다. 1980년대를 지나며 희미해져 갔던 미군과 관련된 지역의 특성이 미군기지의 이전이 확정됨으로써 이 지역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음을 짐작하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미군기지이전이 1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지부진하게 미뤄져 오는 과정에서 이태원 사람들은 이들의 빈자리가 가져올 변화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설명한 지구단위계획 또한 미군이전 문제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2000년대에 들어 구체화된 지구단위계획 안에는 미군기지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계획 또한 구상되어 있었다.



 동아일보 | 2003.06.04  "용산 미군(美軍)기지 이전 이르면 연말께 착수"

용산기지 이전에 대한 기초계획 마련을 마무리했고, 올가을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 보고를 거쳐 연말까지 세부계획을 확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이에 따라 올 연말이나 내년 초부터 경기 오산, 평택지역으로의 이전에 착수한다는 목표로 협의가 진행 중인 것으로 관측된다.


 

그렇게 미군기지의 이전이 결정됨으로써 이태원은 다시 한번 새로운 개발지역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미군의 빈자리에 무엇이 생겨나든 인근에 있는 이태원의 가치는 높아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0년대 초 미군의 철수가 확정된 이후 1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와 관련된 변화가 크게 일어나지 않았던 탓에 이 문제에 대한 상인들의 관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작아져 갔다. 상인들은 미군의 이전이 자신들 세대에서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리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미군의 이전이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미뤄져 오며 큰 변화를 이끌지 못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이로 인해 미군이 살던 거주지가 새로운 성격의 외국인으로 채워지는 등 서서히 이태원의 변화를 진행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군의 이전은 서서히 구성원 차원에서의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구성원 차원의 변화가 이태원의 새로운 문화적 이질성을 형성하는 데 중심이 되었다는 점에서 미군부대의 이전은 이태원의 변화에 중요한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동대문시장의 개발, 지구단위계획의 시작, 지하철의 개통, 미군기지의 이전 같은 사건들은 2000년대 초 연쇄적으로 일어나며 이태원이 변화를 이끌었다. 각각의 사건은 이태원 의류상권의 쇠락과 세계음식거리로 불리는 요식업상권의 부상의 배경이 되면서 이태원을 변화시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이태원의 변화과정과 그렇게 형성된 새로운 문화적 특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사건들이 변화의 배경이 된 것은 맞지만, 실질적인 공간의 쇠락과 발전은 이 시기 이태원을 살아가던 구성원들에 의해 이뤄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이태원의 변화과정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성원 차원에서 변화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김은실, 2004, 『변화하는 여성문화 움직이는 지구촌』, 한국여성학회 편, 푸른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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