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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 Oct 29. 2020

눈 먼 작은 무역상

이태원의 역사_16

이 글은 필자의 석사 논문인 『문화적 엔클레이브 이태원의 한국인 상인들』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다 대중적으로 이태원의 역사를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논문이 가진 학술적인 측면은 축소하고 인간 중심의 역사적 서술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태원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고유의 색을 잃지 않는 이태원이라는 이국적 공간, 그리고 그곳이 터전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태원이 언제부터 어떻게 이국적인 공간이 되었고 이국성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해 그려볼 생각입니다.

   

의류상권의 쇠락


2000년대 초 이태원은 내·외부적으로 지역을 변화시킬 사건들을 겪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의류상인들은 이러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했다. 1980~90년대에는 변화하는 고객층에 맞춰 새로운 언어를 공부할 정도로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의류상인들이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던 것은 어떻게 보면 의외의 상황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물론 이는 이 사건들이 이태원 의류상권에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의류상인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들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이들은 당시 경험할 수 있었던 보다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변화에 주목함에 따라 당시에 일어난 사건들이 가져올 점진적인 변화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예전에는 돈을 벌자고 악착같이 그런 사람이 없었다고. 그러지 않아도 그냥 다 알아서 많이씩 사가니까, 많이 벌 때는 하루에 3000[만원]도 찍었고. 그 당시에 처제가 집을 구한다는데 그게 3000이었으니까 생각해봐 얼마나 큰돈인지.               
오형수, 남 62세


1980년대 초 ‘세일즈로’부터 시작해 자신의 가게를 차린 의류상인들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 이태원 의류상가의 터줏대감으로 자리했다. 이들은 빠르게 성장하던 1980-90년대를 지나며 ‘작은 무역상’이라고 부를 정도의 거래 규모를 통해 많은 돈을 벌었고, 2000년대 초는 이렇게 모아놓은 돈으로 사업을 확장하고자 했던 시기였다. 아래의 증언들이 보여주듯 2000년대에 들어서면 많은 상인이 이태원 안에서 판매를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동대문이나 남대문의 도매업에 뛰어들거나 중국에 진출하는 등 사업의 확장을 시도했다. 


여기서 장사하다가 도매장사 하러 남대문이나 동대문으로 넘어간 사람도 많다고, 장사가 잘 되니까. ...양복점들도 여기서 하다가 다른 데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았지. 여기가 익숙하니까. 뭐 강남 유명한 부띠끄들 있는데 갔다가 적응 못해 돌아온 사람도 있고 그렇지. 지역 파악이 여기만큼 오래 파악을 못하니까, 여기는 그래도 익숙하니까 장사를 할 만한 거고.                                
 이동석, 남, 64세


우리끼리는 다른 나라로 모험도 많이 다녔다고. 그래서 돈 번 사람들 많지. 중국 가방 같은 거 하나 해서. 우리나라 공산품의 1/4도 안 됐으니까. 예전에는 기술이 안 좋았는데 요새는 기술을 다 빼가서 이제는 질도 비슷해.       
오형수, 남, 64세


사실 2000년대 초반에 일어난 사건들을 의류상인들이 완전히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당시 사건들을 인식 하고 있었으나 그 대응 방안이 어긋나며 쇠락을 막지 못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 특히 동대문으로 진출한 사례는 이를 잘 보여주는데, 당시 이태원 많은 의류상인들이 동대문시장을 경쟁상대로 보기보다는 사업을 확장할 공간으로 인식함에 따라 동대문에 진출한 일부에게는 단기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었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이태원 의류시장 자체에는 쇠락을 불러오게 되었다. 특히 새로운 사업에 성공한 사람은 이태원을 떠나기도 했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다시 익숙한 이태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돌아오거나 이태원에 남아있던 의류상인들은 2000년대를 지나 2010년대에 이태원 내에서 변화가 가시화되었을 때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고 느꼈다.     


7-8년 사이에 이태원 업종이 많이 변했다고 할 수 있죠. 예전 같으면 이태원 하면 짝퉁, 가죽, 실크, 보세 의류랑 신발 그리고 공예품하고 관광객들 사가는 부채나 작은 도자기 같은 거하고 금은방. 나라별 시세 차이 때문에 금 거래도 많았고, 그냥 여행 왔다가 선물로 사 가는 사람도 많았는데 요새는 그것도 많이 사라졌어요. 
박주민, 남, 55세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지 않고 이태원에 남아있던 상인들에게도 변화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이유는 있었다. 이는 2000년대 초반에 이태원에 등장한 새로운 성격의 고객과 연관 되어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 동대문의 개발과 한국의 물가 상승으로 인해 이미 이태원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은 급속도로 줄고 있었다. 상인들도 이를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으나 크게 반응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여전히 외국인들이 의류상권에서의 소비를 지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2000년대 이후 이태원 의류상권을 찾는 외국인의 성격은 이전과는 달랐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이전에 오던 외국인 관광객과 비슷해 보였지만, 이들은 단기적으로 수익을 올려 상인들의 눈을 가렸을 뿐 의류상권의 존속에 기여할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연합뉴스 | 2004.12.10  " <해외한류겨울연가·일 양국에 2조 3천억 원 경제효과"

이 연구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드라마 촬영지 관광 상품이 일본의 40-50대 여성을 중심으로 인기를 모으면서 4-10월 한국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이 18만 7천 명 증가했다.     



일본 사람이 미국 사람보다 많아지기 시작한 거는 미군부대 빠지는 것도 큰데, 한류 유행하면서 떼거지로 몰려오기 시작했지, 그때 한류 시작하면서 일본 아줌마들이 떼로 몰려와서 물건 사갔어.                                    
서영인, 여, 57세     


2000년대 이후 이태원을 찾게 된 새로운 성격의 외국인의 대표적인 예는 일본인 중년층 여성이었다. 이들은 2004년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흥행에 대 성공을 거두면서 한국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는데, 이들에 대한 기억은 의류상인들에게 인상 깊게 남아있었다. 

  

일본인 중년층 여성은 이태원이 취급하던 맞춤옷과 짝퉁 같은 비교적 비싼 물건을 살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 고객이었다. 비록 과거 이태원을 찾던 보따리상들만큼 소비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한동안 이태원 의류시장의 단골이 되어 꾸준히 소비를 이어갔다. 그러나 이들의 소비는 의류상인들의 눈을 속였을 뿐 실직적으로 상권의 쇠락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일본인 중년 여성은 1990년대 이후 줄어가는 미주, 유럽권 관광객에 비해 일본인 비율이 높아져가는 상황에서 그 존재가 부각 되었을 뿐, 실질적으로 이태원에 재활성화를 가져다줄 만큼 그 수가 많지도 소비규모가 크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특히 이태원 의류상권 안에서도 일본라인에 자리한 상인들은 일본인 중년층 여성의 방문으로 인해 상권의 쇠락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


학원 선생들도 초반에는 엘리트들만 왔는데 요새는 티샤츠 쪼가리 입고 가르치니까. 예전에는 학원 자체에서 양복 맞추러 오고 그랬어. 학원에서 양복밖에 못 입으니까. 예전에는 그렇게 선생들도 양복 입고 그랬는데 예전만큼 양복에 대한 수요가 줄어든 것도 한 몫하지, 양복이란 게 최소한의 예의를 준다는 느낌인데 요새는 뭐 그런 게 있나.    
오형수, 남, 62세


이러한 상황은 양복점의 경우에도 비슷했다. 2000년대 들어 80-90년대 양복점을 방문하던 외국인 관광객이나 한국에 거주하는 주재원 같은 사람들의 수가 현격히 줄어가고 있었지만, 이들의 빈자리는 영어강사들로 채워졌다(서울역사박물관 2010:251). 외국인 강사들 또한 이전에 양복점을 방문하던 손님과 비교했을 때 소비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2000년대 초 학원가에서는 이들 영어강사들이 양복을 입고 강의를 하는 것을 원칙으로 두었기 때문에 이들이 유입되던 시기에는 새로운 고객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면서 양복점 상인들의 눈을 가릴 수 있었다. 게다가 이들과 관련해 종종 학원에서 단체로 옷을 맡기는 등 대량으로 양복 주문도 들어왔기 때문에 양복점들은 과거와 비슷한 수준의 매출을 올릴 수 있었다. 이외에도 2000년대가 되면 다단계회사에 납품하기도 하며 양복점들은 수입을 올렸는데, 이러한 상황은 양복점을 운영하는 상인들의 눈을 가려 상권의 쇠락을 별로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양복점과 일본라인을 제외한 다른 영역들 즉 헬로라인과 이태원시장 쪽 상인들도 2000년대 이후 손님의 변화를 경험했는데, 이들의 경우 외국인에서 외국인으로의 교체가 아닌 외국에서 한국인의 교체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일본라인과 양복점들과는 달랐다. 그리고 이는 이태원 의류상권의 국제화된 성격이 약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다양한 업종 중에서도 보세옷 상점의 경우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일명 ‘강남 아줌마’로 불리는 한국인 손님이 주요 고객이 되면서 1980년대 초반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이 드나들던 이질적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 또한 2000년대 이후 늘어나는 한국인 손님 덕택에 생계가 유지됨에 따라 변화에는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일본라인은 여전히 일본인이 있지만 예전 같지는 않고, 헬로라인은 요새 한국 사람밖에 없어. 한 10년 전부터 헬로들은 비싸서 여기 안 와. 전반적으로 요새 물가가 비싸지고, 인건비도 비싸지고 하면서 사람이 준거지. 아무래도 물건 자체가 좋아지기도 했지만, 한국 물가가 예전 같지 않으니 관광객들이 쇼핑하러 오지 않아       
황서연, 여, 56세

  

이처럼 2000년대 초반에 시작된 변화를 이태원의 의류상인들은 각기 나름의 이유로 제대로 체감하지 못했다. 이미 외국인 관광객의 수는 눈에 띄게 줄어갔지만, 이전에 벌어 놓은 재산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거나 나름의 수입을 유지할만한 손님층의 대체가 잠시 동안은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상인들이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은 이 시기의 변화가 완전히 새로운 형태가 아닌 과거의 모습 위에 덮여진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과거 미군에서부터 시작해 국제화된 모습을 가졌던 이태원은 그 발판 위에서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고, 새로운 성격의 외국인을 손님으로 받아들이는 형태로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변화를 쉽게 인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랬던 의류상인들이 자신들이 쇠락의 길에 들어섰음을 스스로 체감하게 된 것은 2010년 이후 이태원의 새로운 중심지인 ‘세계음식거리’라 불리는 요식업상권이 탄생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참고문헌 

서울역사박물관, 2010, 『이태원 : 공간과 삶』,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서울: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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