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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 Jul 11. 2020

국제도시 이태원

이태원의 역사_10

 이 글은 필자의 석사 논문인 『문화적 엔클레이브 이태원의 한국인 상인들』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다 대중적으로 이태원의 역사를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논문이 가진 학술적인 측면은 축소하고 인간 중심의 역사적 서술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태원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고유의 색을 잃지 않는 이태원이라는 이국적 공간, 그리고 그곳이 터전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태원이 언제부터 어떻게 이국적인 공간이 되었고 이국성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해 그려볼 생각입니다.


88올림픽을 준비하며 


1980년대 초 이태원 의류상권이 ASTA 총회를 통해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관광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임이 확인되자 이태원은 한국정부에게도  관광쇼핑지로 인정받게 된다. 올림픽을 대비하는 과정에서 외국인의 소비를 이끌 관광쇼핑지를 찾고 있던 한국정부가 ASTA 총회를 통해 이태원의 관광쇼핑지로서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ASTA 총회 이후 이태원은 본격적으로 올림픽을 대비해 정부에서 지원하는 외국인 관광쇼핑지로 개발되기 시작한다.     


 경향신문 | 1984.02.21.  "梨泰院(이태원) 외국인 쇼핑名所(명소)로 "      


그런 개발과정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이태원에 들어서기 시작한 대형 쇼핑센터들이었다. 1983년 ASTA총회를 치를 때까지도 아직 이태원에는 1970년대 초 지어진 이태원시장 건물과 해밀턴호텔을 제외하고는 높은 층수의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은 ASTA 총회 이후 IPU 총회, IMF 총회, IBRD 총회 등 올림픽 이전까지 다양한 국제행사를 치렀고, 이와 함께 이태원에는 대형 쇼핑센터가 하나둘씩 들어섰다. 여기서 말하는 대형 쇼핑센터는 88올림픽을 겨냥해서 이태원 재개발계획에 따라 세워졌던 백화점형 쇼핑센터로 한 건물 안에서 식사와 유흥 쇼핑까지 모든 것을 이용할 수 있게 만들어 쇼핑객들의 편의를 도모했다(매일경제 1985 .12.14.). 그렇게 대형건물들이 곳곳에 들어서면서 이태원은 표면적으로도 관광쇼핑지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모해갔다.     


매일경제 | 1986.11.20.  "이태원지역 건축 활발 대형건물 잇달아 新築(신축)"


한림플라자 상가빌딩이 이미 완공된 데 이어 지하 5층 지상 12층 연면적 7천 6백여 평에 달하는 대형 유통센터인 팬다리아가 공사 중인 것을 비롯, 덕흥빌딩, 동호프라자, 세계로 상가 등 대형 상가빌딩이 들어서고 있다.


 

이태원 의류상권의 변화는 상권이 취급하는 상품의 변화에서도 드러났다. ASTA총회 이후 88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태원에는 올림픽과 관련된 상품이 늘었음은 물론이고 기존에 주류를 형성했던 양복, 보세옷과 함께 가죽으로 된 의류, 신발, 가방 등 다양한 맞춤상품 또한 급격히 증가했다. 그렇게 이전보다 상품의 다양성이 증가하면서 상권의 규모는 점점 더 커졌고, 88올림픽이 다가오기 이전 이태원 의류상권은 양복, 가죽, 가방, (가죽)신발, 실크 등 외국인 관광객들이 좋아하는 5가지 제품을 주력 상품으로 하며 관광객의 발길을 끄는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서울역사박물관 2010:242). 특히 이중에서도 명품짝퉁의 증가는 외국인들의 큰 관심을 끌며 이태원을 짝퉁의 메카로 만들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이태원의 의류상권이 번성하자 자연스레 이들과 연관되어 있던 이태원의 가내공장들 또한 규모를 확장하게 된다.    

  

여기 양복공장도 얼마나 많았냐고, 여기 있던 한식당들이 공장 서너 개만 잡아도 먹고 산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공장 하나에 8명 정도 있으니까 이 사람들 점심 저녁 해서 잡으면 몇 명이야, 그러면 서비스로 소주도 주고 그랬는데.      

오형수, 남, 62세     

 

보세물품의 카피를 통해 형성되기 시작한 이태원 의류상가 주변의 가내공장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 그 성격을 변화시켜 오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양복과 맞춤 가죽상품 그리고 짝퉁 가방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자 그 성격을 바꾸는 한편 그 수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졌다. 1980년대 중반이 되면 이미 이태원 대로변의 건물 지하와 대로변 양쪽 이면 도로의 가정집은 전부 공장과 창고가 되었을 정도였다(서울역사박물관 2010:78). 기존에 대로변에 섞여 있던 주거지가 1970년대를 지나며 모두 의류상점으로 변한 것처럼 이태원 의류상권 위쪽과 아래쪽으로 위치해 있던 주거지들이 가내공장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처럼 상권의 규모가 확장되었을 뿐 아니라 상권 외에 다른 영역에도 의류상권을 돌아가게 하기 위한 가내공장 등 보조적인 요소가 증가했다는 사실은 의류상권이 지역에서 갖는 영향력이 커졌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매일경제 | 1985.09.16. "韓國(한국)상품 外國人(외국인)이 좋아한다."


... 최근에는 일본에서 살고 있는 구미각국의 외국인들이 주말을 이용, 우리나라에 오는 원정 쇼핑경향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상품을 사가지고 가서도 팔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기 때문이어서 우리나라가 국제적인 쇼핑지로 부상할 가능성마저 보여주고 있다. … 한국을 다녀간 외국인들의 입을 통해 한국의 시장과 상품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고 이로 인해 이태원을 찾는 외국관광객수가 매년 20~30%씩 늘고 있다고 말했다.


1980년대 초반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이태원은 이미 88올림픽을 맞이하기 이전 국가적으로 홍보하는 관광쇼핑지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관광객들 사이에서의 명성은 빠르게 높아져 갔고, 88올림픽이 다가올수록 이태원은 일본인과 일본에 있는 관광객이 주말을 이용해 방문할 정도의 쇼핑명소가 되었다. 위의 기사는 이 시기 이태원에 유입되기 시작한 일본인 관광객이 그 자체로 미군이 아닌 관광객이 이태원의 주요 고객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태원이 더 이상 술과 마약 같은 기지촌으로써의 어두운 모습과 연관되어서만 설명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제 이태원의 풍경은 대부분 외국인 관광객과 연관되어 묘사되었다.


이태원 의류상권은 이제 의심할 여지없이 소방서 인근의 유흥지대만큼이나 이태원을 대표하는 공간이 되었다. 의류상권이 형성 초기에 보여주던 미군과 관련된 특성은 이미 지워진지 오래였고, 국제화된 의류상권은 이태원 자체를 변화시켰다. 모순되게도 미군을 상대하던 공간이었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던 의류상권의 장점이 결국 지역 전체에서 미군의 성격을 약화시키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1980년대를 거치며 의류상권이 관광쇼핑지로 급격히 성장하면서 이태원이 새로운 모습을 가지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에 이태원에 새로이 등장한 영어가 가능한 ‘세일즈’의 역할이 컸다.



참고문헌

서울역사박물관, 2010, 『이태원 : 공간과 삶』,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서울: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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