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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 Jun 08. 2020

미군을 위한 양복과 자수

이태원의 역사_6

이 글은 필자의 석사 논문인 『문화적 엔클레이브 이태원의 한국인 상인들』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다 대중적으로 이태원의 역사를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논문이 가진 학술적인 측면은 축소하고 인간 중심의 역사적 서술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태원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고유의 색을 잃지 않는 이태원이라는 이국적 공간, 그리고 그곳이 터전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태원이 언제부터 어떻게 이국적인 공간이 되었고 이국성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해 그려볼 생각입니다.


바늘과 실을 다루는 사람들


1970년대 초 장사를 시작한 상인들에게서 주목해볼 만한 부분은 이들이 주로 미군을 상대로 장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어 실력이 그리 출중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몸짓이나 짧은 영어로 장사는 할 수 있었지만, 서류를 작성하거나 긴 대화를 통해 교류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시기에 이태원에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은 상인보다는 미군부대 내에서 일하면서 임대업을 하는 토박이들이었다. 


이 시기의 상인들이 미군을 상대로 장사를 하면서도 영어실력이 출중하지 못했던 이유는 이들의 이주 배경과 관련이 있다. 대부분의 상인은 지인을 따라 어린 나이에 이태원에 오게 된 경우가 많았고 그것은 이들이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교육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다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초기 이태원에 유입된 기지촌 이주민의 경우 기지촌에서의 장사 경험 덕분에 그나마 몸짓과 짧은 영어로 소통할 수 있었지만, 이들을 따라 이차적으로 이태원에 유입된 사람은 영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던 데다 이태원에 유입된 이후에도 초기에는 재봉일을 하거나 자수를 놓는 기술공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영어실력이 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직접 미군을 대할 기회가 비교적 적었기 때문이었다. 현재까지도 상인들의 이주 시기와 과정을 보면 이들의 영어실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초 의류상인들의 영어실력이 어떠했건 당시 이태원의 의류상권이 미군 색이 짙은 공간이었다는 점은 분명했다. 비록 영어실력이 유려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이 가진 기술은 미군들을 이끌기에 충분했다. 특히 1970년대 초 이태원에 자리했던 업종 중에서도 양복점과 자수집은 미군에게 인기를 끌었던 업종으로 당시 이태원 의류상권 안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며 이곳이 미군들을 위한 공간임을 강하게 보여주었다. 물론 이 외에도 청바지와 같은 일반 의류상점들도 다른 지역과 차별된 성격의 옷을 취급하는 등 미군과의 연관성을 보여주었지만 당시 이태원에 있던 양복점과 자수집은 업종 자체가 미군만을 위해 존재했다는 점에서 그 성격을 더 강하게 표출했다.

   

기지촌 이주민들에 의해 이태원시장 인근에 형성된 양복점들은 오롯이 미군을 위한 곳으로 미군들이 부대 내의 행사에 참여하거나 외출을 하기 위한 옷을 맞추러 나올 때 방문하는 곳이었다. 당시 미군부대 주변에 양복점이 들어섰던 이유는 맞춤 양복임에도 불구하고 질이 좋고 가격이 싼 덕분에 미군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평소 양복을 입을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압도적으로 저렴한 가격의 한국 맞춤 양복은 미군의 지갑을 열었다. 사실 양복점은 미군부대 내에도 자리했기 때문에 부대 밖의 양복점은 1970년대 초에는 이태원시장 주변에 십여 개에 불과했지만, 이후 이태원 의류상권의 주력 상품으로 자리하게 될 정도로 점차 그 수가 늘어나게 된다.   


당시 양복점은 따로 공장이나 창고를 두고 있지 않았다. 가게 바깥쪽에는 옷을 진열해 놓고 가게 안쪽으로는 원단과 재봉틀이 자리 잡아 주문을 받는 대로 기술공이 바로 옷을 생산해 냈다. 현재 이태원에서 볼 수 있는 양복점들보다 훨씬 작은 규모였던 1970년대의 양복점들은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작은 공간에 자리하여 다닥다닥 붙어 있었지만 쉴 틈 없이 돌아갔다. 그러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슬레이트 지붕의 건물이 헐리고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매장의 크기도 시장 자체의 규모도 커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태원시장이 의류시장으로 변화하면서는 매장 안에 있던 일종의 공장과 창고도 이태원시장 지하로 이동하게 된다. 그렇게 양복점은 이태원시장 전반으로 퍼지게 되는데 이후 1980년대 의류시장을 방문하는 손님층이 미군을 넘어 관광객 전반으로 확장되면서 양복점은 더 성황을 이루게 된다. 양복의 경우 서구문화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입는 의복으로 정착함에 따라 오히려 관광객이 들어오면서 절대적인 손님수가 늘어나 양복에 대한 수요도 증가하게 된 것이다. 

자수집은 현대에는 익숙한 업종이 아니지만 1970년대 이태원 의류상권에서는 이국성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업종 중 하나였다. 다만 양복의 경우 하나의 외국문화를 보여주는 업종이었다면, 자수는 이태원이 단순히 이방인의 공간이 아닌 군인이라는 특정한 직종을 위한 공간임을 보여주는 업종이었다. 현재 군부대 주변에 있는 자수집들처럼 당시 자수집 또한 군인들이 이름을 새기거나 계급을 표시하기 위한 마크를 만드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이태원시장 주변에 남아 있는 자수집들은 여전히 미군들의 계급 마크와 같은 물건들을 한편에 진열해 놓음으로써 이곳이 미군들을 위한 공간이었다는 흔적은 남겨놓고 있다.    

현재 이태원시장 인근에 남아 있는 자수집이 겪어 온 시간의 흐름을 잘 보여준다.


자수집은 이후 이태원 의류상권의 규모가 커져갈 때 양복점처럼 이태원의 주력상품으로 자리하지는 못했다. 이는 양복의 경우 서양 전반의 문화였지만 자수는 군인들을 위한 특수한 업종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생존을 위해 자수집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군 관련 자수뿐만이 아니라 일반 의류에 동양적인 문양을 새기는 방향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그 이후에는 과잠바를 새기는 가게로까지 성격이 변화하기도 했지만 이후의 상황을 보면 그리 성공적인 시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980년대 이태원이 관광 쇼핑지로 부상할 때 자수는 군인이 아닌 일반 관광객의 시선을 끌지 못해 관광상품으로 자리잡지 못했다. 다만 1980년대에 그 성격이 변했다고 해서 기존에 이태원 의류시장과 깊은 연관이 있던 미군들이 발길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자수집들은 이태원시장 인근에서 명맥을 유지해 올 수 있었다. 


60~70년대에는 미군기지로 역할을 하면서 군인들의 세상이었다고 할 수 있지. 모든 사람들이 군인들한테서 벌어먹던 생활을 하던 시기야. 모든 사업이 군인들 위주로 돌아가던 시기였던 거지. 뭐 군인들한테 상패 만들어주는 가게, 양복, 자수 박아주는 가게, 신발, 잠바, 모자 다~ 군인들을 위주로 사고파는 상황이었지.         

장태진, 남, 59세     


이처럼 1970년대 초 기지촌 이주민에 의해 형성되었던 양복점과 자수집 같은 의류상점들은 미군을 주요 고객으로 하며 이태원이 한국의 여타 지역과는 다른 공간임을 보여주게 된다. 이 공간이 표현했던 미군과 관련된 특성은 1970년대 후반이 되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의류상권이 대로변으로 확장되면서 외국인 관광객과 한국인까지도 수용하는 공간이 되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변화가 계속 찾아오는 상황에서도 이태원시장 인근에는 여전히 미군의 색을 짙게 띠는 상점들이 남아있어 이곳이 미군을 위한 공간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이태원 의류상권이 가졌던 미군과 연관된 이국성은 이태원이 변화하는 과정에서도 그 흔적을 남기는 동시에 이후 생겨나는 변화의 배경이 된다. 이는 이태원 의류상권의 변화를 넘어 이태원 전반의 변화로까지 이어지게 되는데, 그러한 변화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다음에 살펴볼 보세 옷의 유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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