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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 May 21. 2020

한국 안의 미국 땅 이태원

이태원의 역사_2

이 글은 필자의 석사 논문인 『문화적 엔클레이브 이태원의 한국인 상인들』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다 대중적으로 이태원의 역사를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논문이 가진 학술적인 측면은 축소하고 인간 중심의 역사적 서술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태원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고유의 색을 잃지 않는 이태원이라는 이국적 공간, 그리고 그곳이 터전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태원이 언제부터 어떻게 이국적인 공간이 되었고 이국성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해 그려보고자 합니다.    


미군과의 공생 


이태원에 점차 사람들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미군이 용산으로 이전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55년, 정부가 UN군 가족 및 OEC 직원을 위한 주택단지를 이태원 인근 한남동에 조성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최종일 2003:30). 사실 이 또한 일본인들의 흔적이었다. 한남동에 조성된 주택단지는 해방되기 몇 년 전 일본인 고급관료의 관사로 사용하기 위해짔고 있던 건물이었는데 일본의 패전으로 비게 되자 미군이 이를 그대로 활용했다. 한남동 외인주택의 형성으로 이태원이 미군부대와 군인이 거주하는 주택가를 잇는 길목이 되자 자연스레 기지촌이 형성되며 사람들도 모여들었다. 그리고 1956년 외인주택의 완공과 함께 1957년 미군들의 외출과 외박이 허용되면서 이태원은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한다. 과수원과 밭 사이로 하나둘 건물이 들어섰고 사람들이 채워졌다. 서울의 대표적인 이국적 공간으로서 이태원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초기, 즉 1960년대의 이태원 상업공간은 클럽을 중심으로 한 윤락가의 형태로 발전했다. 그렇기 때문에 1960년대 이태원에서 가장 활성화되었던 공간은 유흥지대가 형성된 곳이었다. 당시 처음으로 유흥지대가 형성되었던 공간은 현재 이태원 소방서 인근이었다. 이곳이 오래전부터 시장이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미 존재하던 상권 주변으로 클럽 및 주점들이 생겨났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 1957년 ‘UN클럽’을 필두로 미군을 상대로 한 클럽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본격적으로 외국인 전용 클럽가로 활성화된 것은 1962년 ‘세븐클럽’이 개업하면서부터였다(ibid.:32). 그렇게 형성된 유흥지대는 미군들을 위한 곳으로 이태원 안에서도 이국성이 뚜렷하게 표현되는 공간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이태원의 다른 구역들 또한 그 나름의 생활 속에서 미군과 어울리며 한국의 여타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경향신문/ 1971.06.10/"13일 까지, 흑백 싸움 등 불상사 잇달아 서울지구 미군 금족령"
여기 처음 시집왔을 때는(60년대) 뭐가 없었지, 그냥 저기 위에 집 한 칸. 여기는 우리 집 말고는 집도 별로 없었어. 70년대나 돼야 좀 집이 많아졌지…. 우리 집에도 미군들 많이 살았지. 아저씨가 영어를 그래도 하니까 걔네들 방 세주고. 그때 미군들이 사니까 빨래도 해주고 그랬어. 걔네는 청바지도 입고 대부분 군복인데, 아휴 그때는 말도 마라 얘. 맨날 그때는 세탁기가 있길 했니 그냥 다 손으로 하루 종일… 미군들 또 얼마나 크냐, 군복이라 또 옷은 얼마나 뻐석뻐석 한지... 하루 종일 아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얘. 그때는 내가 지금처럼 덩치가 큰 것도 아니고 나도 빼빼 말랐었다고 너 마냥. 그러니까 얼마나 힘들었겠니.                               
                                                                                                                                             
박성자, 여, 83세


1960년대가 되면 이태원 1동을 넘어 이태원 2동까지도 크고 작은 집들이 조금씩 들어서기 시작했고, 당시 이곳에 살았던 대부분의 한국인이 미군과 관련된 업종에 몸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태원의 한국인들은 미군의 영향을 크게 받는 상황이었다. 소위 ‘양공주'라 불리는 여성들과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직원은 물론이고 이태원에 방 한 칸이라도 가진 사람이라면 임대업을 통해 미군과 어울리며 살았다. 1957년 미군의 외박과 외출이 허용되고 부대 밖에서 거주할 수 있게 된 덕분이었다. 작은 방 한 칸에도 군인들이 빽빽하게 차 있었을 정도로 임대업은 성황이었고 많은 한국사람, 특히 토박이 중 남자는 부대에서 일을 하거나 방을 임대 주고 여자는 미군의 빨래를 해주는 식으로 미군에 의지해 생계를 이어갔다. 이태원 전반에 미군과 연관된 이국적인 모습이 뿌리 깊게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일상에서 이국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던 공간 중 하나는 의외로 한국 어디서든 볼 수 있던 구멍가게였다.


우리 아버지는 여기 분은 아니셨는데, 60년대에 올라오셔서 저기 보광동 가는 길에서 구멍가게를 하셨어요. 그때도 그쪽에 클럽이랑 그런 게 있으니까, 음료수랑 얼음을 해서 판 거죠. 장사가 잘 돼서 나중에는 해밀턴 옆에 지금 카페 있죠? 그쪽으로 옮겨서 크게 하시다가 나중에 그만두셨어요.                     
                                                                                                                                           신재표, 남, 62세
그때 우리 어머니도 동네 사람들 상대로 미제를 팔았어요. 우리 집에도 양색시랑 미군이랑 살았으니까. 어릴 때 집에 있으면 우리 집 살던 미군이 퇴근해서 미제 과자 같은 거 하나씩 주고 그랬는데. 우리 어머니는 이제 그런 거 받아서 동네 사람들한테 팔고 그랬죠. 그때는 뭐 미제라고 하면 다들 눈이 멀었으니까. 나는 집에 미군이 사니까 자주 먹어서 좋았지.                                                     
                                                                                                                                           정기훈, 남,  62세 


지금은 대형마트나 편의점의 확산으로 찾아보기 힘들지만, 구멍가게는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상업시설이었다. 이태원에도 이런 구멍가게들은 한 골목에만 3-4개씩 있을 정도로 즐비해 있었는데 다만 이태원의 구멍가게는 미제 물건, 즉 PX 물건을 취급한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과는 차이를 보였다. 1970년대 이후가 되면 PX 물건의 유출은 규모가 커지면서 단속의 대상이 되지만(ibid.: 29), 1960년대까지만 해도 PX 물건의 거래는 미군과 함께 사는 양공주나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사람을 통해 소규모로 이뤄져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태원의 구멍가게들은 당시 한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소시지나 캔 음식 같은 미제 물건을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당시 주변의 부촌 사람들과 돈 좀 있다고 하는 한국 사람들이 미제를 찾아 이태원에 오고는 했을 정도로 구멍가게는 꽤 좋은 돈벌이였다. 


구멍가게는 1970년대 '이태원시장'을 중심으로 새로운 상업지역이 형성되기 전까지 이태원 사람들의 생계에 크게 기여했던 업종 중 하나로 구멍가게를 운영했던 사람들은 돈을 벌어 1970년대가 되면 사업을 확장하거나 건물을 지어 임대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렇게 1960년대를 지나며 이태원은 작은 일상 속에서조차 이곳이 미군의 영향을 받은 지역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공간으로 변화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러한 특성은 이태원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요소가 되어 1970년대가 되면 이태원의 문화적 특성을 표현하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해 내기에 이른다. 이 공간이 자리하게 된 곳은 '이태원시장'으로 현재 맥도날드가 있는 주변을 말한다. 1960년대까지는 미군이 아닌 한국인들을 위한 평범한 재래시장에 불과했던 '이태원시장'은 1970년대가 되면서 변화를 겪고 이국적인 공간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지역의 특성에 이끌려 이태원에 유입된 타지 사람들이었다.          


참고문헌

최종일, 2003, "이태원 공간에 나타난'아메리카나제이션(Americanization)'에 관한 연구" ,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석사학위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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