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AM에도 두렵지 않은 이유
어느 여름 심야영화를 보고 밤새 친구와 산책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밤이 있다. 그날 봤던 영화가 무엇인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적당히 고요하고 선선했던 밤 공기만은 여전히 선명하다. 영화는 한 시가 조금 넘어 끝이 났고 우리는 선선한 밤공기를 즐기자며 용산역에서 이태원까지 걷기로 했다. 삼각지까지 오는 길은 오가는 사람이 없어 제법 무서웠으나 그 와중에 신이 났는지 삼각지에서 녹사평까지 이어지는 넓은 가로수 길에는 우리의 말소리가 가득했다. 거진 한 시간을 걸어 이태원에 도착했다. 그렇게 수다를 떨었는데도 전혀 지치지 않았던 우리는 집에 가기 아쉬운 마음에 동네 한 바퀴를 돌기로 했다.
밤의 이태원은 여전히 활기찼다. 새벽 3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인데도 거리에는 아직 문을 닫지 않은 가게들과 방황하는 영혼들이 적당한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주말이 아닌 평일이었음에도 유독 밤공기가 좋았던 탓인지 길을 거니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로 들어갔다. 피크타임이 지나 그리 분비지 않으면서도 아예 오가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라 으슥하지도 않은 새벽 3시의 이태원은 산책을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날 우리는 이태원 한 바퀴를 아주 크게 돌며 밤새 수다를 떨었다.
여전히 여름밤이면 자주 이태원 거리를 거닌다. 친구들과는 소위 사람 구경이라 부르는 이태원 큰길 산책은(이태원 주민의 산책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남산 산책, 한강 산책, 큰길 산책) 큰 볼거리가 없어도 재미가 쏠쏠하다. 그저 사람들이 어떻게 노는지, 어떤 옷을 입고 다니는지, 어떤 사람들이 이태원에 오는지 같은 것들을 구경하며 거리를 걷다 보면 어느새 한남동에 다다르고 다시 이태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같은 일을 반복한다.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가게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들은 신경 쓰지도 않고 수다에 매진하기도 하며, 주말이면 거리에 나오는 버스킹 공연을 보느라 한참을 길바닥에 앉아 있기도 한다. 그렇게 말 그대로 오밤중의 정신없는 거리를 걷고 나면 뭔가 활력이 차오르는 것만 같다.
이태원의 밤, 특히 이태원의 여름밤은 그렇게 활기차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뭐랄까 범죄에 노출되기엔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고 밝아서 안전한 느낌이랄까? 내 주거공간에 사람이 끓어 넘치는 건 대부분 피로함을 몰고 오는 일이지만, 가끔은 사람이 언제나 넘쳐흘러 이 시간에도 돌아다닐 수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든다(피곤한 안전이라 모순이다). 이태원이라고 하면 왠지 범죄의 위험이 가까이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만도 않다는 소리다. 이태원에 사는 건 그리 무섭지만은 않다.
물론 골목길에 들어서거나 술 취한 사람들이 가까이 오면 두려워지지만 그건 어디든 그렇지 않겠는가. 좁은 골목길에서 단 둘이 마주한 취객은 무섭지만 큰 길거리의 대중 속에서 마주한 취객은 그저 피해 가면 그만이다. 다행히 누군가 이태원의 골목마다 취객을 심어 놓지는 않았으니 늦은 밤 집에 가는 길의 긴장감은 여느 동네와 비슷할 듯하다. 요즘 들어서는 주거지역까지 상점이 깊이 파고들고 있어 일종의 안전지대(?)가 늘어나는 느낌이기도 하다. 집 바로 앞까지 사람이 얼마나 가득한지..(할많하않). 무엇보다 이태원의 큰길은 밤새도록 방황하는 영혼들로 가득하니, 가끔 잠이 오지 않는 여름밤이면 가볍게 산책을 나갈 수 있을 정도로는 안전하다.
가끔 이태원의 시간이 다른 곳보다 느리게 흘러가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인적이 드물어지는 밤 12시에도 여전히 밤 9시 같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바로 이태원이니 말이다. 특히 어느 계절보다 이태원의 여름밤은 유독 천천히 흘러가는 듯하다. 그러니 어느 여름밤 이태원에서 막차를 놓치게 된다면 거리 산책(사람 구경)을 한 번쯤은 나서보길 추천한다. 다른 이들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그들을 관찰하며 거리를 거닐다 보면 새로운 이태원이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한 손에는 편의점 아이스커피를 들고 주말이라 버스킹까지 즐길 수 있다면 그 밤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