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초등학교
나의 모교 이태원 초등학교, 이번에는 고향이라는 말 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초등학교라는 단어가 이태원과 붙었다. ‘이태원’초등학교라니 뭘 가르칠까 싶을 수도 있겠으나 그냥 평범한 학교였다. 심지어 옆 동네 보광초등학교에 비해 오히려 아이들이 좀 더 순수했던 것도 같다. 어쨋든 사람 사는 동네이다 보니 이태원에도 초등학교가 있었다.
이태원 초등학교는 예전부터 다른 학교들에 비해 작은 학교였다. 주변에 주거지가 그리 크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옆 동네의 보광초등학교가 한 학년에 10반이 넘게 있을 적에도 우리는 겨우 4반을 채웠다. 그럼에도 학교는 알차게 돌아갔다. 아담한 학교였지만 갖출 건 다 가췄고 귀여운 시고르자브종인 ‘이태원’이라는 이름의 강아지도 있었다.
학교는 건물 세 채로 이루어져 있었다. 본관과 저학년 건물, 고학년 건물 이렇게 나눠졌던 걸로 기억한다. 저학년 건물 뒤편에 작은 소운동장이 있고 고학년 건물과 본관 건물 사이에는 작은 주차장과 사육장, 텃밭이 있었다. 본관 건물과 고학년 건물은 4층쯤에서 이어져 있었으며 고학년 건물에서 보는 풍경이 제일 멋졌다. 그 건물에 도서관이 있었다. 나의 첫 도서관이자 읽는 즐거움을 알려준 추억이 담긴 곳이다. 작은 학교였지만 도서관은 제법 그럴듯하게 채워져 있었다. 처음 시작은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책을 읽기 위해서였지만, 점차 도서관은 학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 되었다. 아직도 그때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고양이 전사들>이란 책이 기억난다. 제목은 저래도 꽤 흥미진진한 책이다.
본관 정면으로는 넓은 운동장과 등나무 벤치가 있었다. 여름이면 등나무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면서 벌이 꼬였고 아이들도 모여들었다. 나 또한 더운 여름 유일하게 그늘이 지는 등나무 아래를 좋아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도 학교가 끝나서도 항상 등나무 아래에서 머물다 갔다. 등나무에 꽃이 피던 그 계절을 가장 사랑했다. 몇 학년 때였는지 등나무 아래에서 야외수업을 한 적이 있다. 햇살이 좋은 날 등나무 아래에서 미술수업을 할 줄 아는 낭만적인 담임선생님을 뒀던 건 행운이었다. 연한 보랏빛이 축 늘어져 피어있는 모습이 어린 눈에도 얼마나 이뻐 보이던지 나는 그날 등나무 꽃을 그릴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지만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 특이하게 기억되는 것 중 하나는 한 때 미군들이 학교에 와서 영어를 가르쳤던 시간이다. 초등학교 4-5학년 때 즈음이었던 것 같다. 한 학기 정도 토요일마다 미군들이 군복을 입은 채 학교에 와서 아이들과 영어로 수업을 했다. 미군 선생님은 빈손으로 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 시간을 좋아했다. 미군들은 언제나 한국에선 보기 힘든 외국 간식을 가득 가져왔고 아이들은 토요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벤트는 짧게 끝났고 간식을 더 이상 먹을 수 없다는 아쉬움은 길게 남았다. 그때 간식으로 먹은 해바라기씨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지금까지 기억날 정도다.
생각해 보면 이태원이었기 때문인지 심지어 유치원 때도 원어민 선생님이 있었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도 당연히 원어민 선생님들이 학교에 있었다(그런데도 이렇게나 영어를 못한다니...). 어쩌면 이런 사소한 게 이태원에 사는 특별함이었을 수 있게 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특별함이 모두에게 잘 사용되는 건 아니라는 게 내 존재로 증명되지만 말이다. 대학에 가서 만난 외국인 선생님들도 이태원에 사는 경우가 많아 가끔 집에 가는 시간이 겹칠 때면 버스 창 밖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괜히 눈이라도 마주쳤다가 말이라도 걸면... 영어실력이 많이 늘었겠지...
원어민 선생님들은 언어만큼이나 미국 문화를 알려주기 위해 많이 노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떤 것들이 무례한 일이 되는지, 문화적 차이는 무엇인지를 수업을 통해 많이 배웠다. 재밌는 건 이태원에 살면서도 외국인인 원어민 선생님을 마주하는 건 좀 두려웠다는 데 있다. 그렇게 매일 같이 외국인들을 마주치면서 사는데도 학교에서 보는 외국인은 왜 그리 어색하고 무서웠는지. 길에서 만난 외국인은 말을 안 걸지만 학교에서 만난 외국인은 말을 걸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교실에서는 바디랭귀지를 쓰는 게 허용되지 않았다. 외국인은 두렵지 않았으나 외국어는 두려웠던 시절이었다.
가끔 그때 그 선생님들은 뭘 하며 살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그 홍콩 출신 군인 아저씨는 지금 홍콩에 있을지 미국에 있을지, 집까지 초대해 줬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캐나다 선생님은 여전히 맛없는 야채스튜를 끓여먹고 있을지, 할머니 선생님은 아직 살아 계실지 궁금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