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말고 PD 말고 비디오그래퍼, 비디오그래퍼요!"
어느덧 광고 회사 창업 3년차가 되었다.
안 그래도 레드오션 중 레드오션이라 불리는 광고회사, 그 중에서도 영상 프로덕션의 창업을 쉽게 결정내릴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오만으로 넘어서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고 내가 성공해야만 하는
이유를 내 주변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찾았다.
'표현의 차이는 깊이의 차이'라는 슬로건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결과는 또 다른 누군가의 인정을 만들었고
회사는 그렇게 한 걸음 더 올라설 수 있었지만 섣불리 성공의 잔을 들기에는 너무도 이른 시기였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창업 3년차. 성공의 기준점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쉽게 도태의 유혹에 빠질 수도 있었고 쉬이 지쳐버릴 수도 있는, 그런 상황에 이르렀다.
회사의 구성원을 늘리고 구조를 탄탄하게 잡아야할 때가 왔을 때,
나는 회사 내부에서 대표라는 직함을 버렸다.
직함을 내려놓는다는 의미는 대표로서 해야하는 역할과 책임에서의 탈출이 아니라 실무의 과정을 함께
호흡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선택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게 좋은 결정이냐고. 대표가 실무에 관여하면 직원들이 싫어한다고, 대표는 밖에서
돌아야 회사가 큰다며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악의 없는 의욕이 잔소리와 간섭 혹은 감시로
여겨질 수도 있고, 가볍게 낸 의견 하나가 업무의 흐름을 방해하는 사례들은 적잖게 듣기도 한다.
하지만 초창기의 스타트업은 대부분 팀 체제로 운영이 된다.
많은 조직문화 관련 인사 전문가나 경영자들도 강조하는 업무의 분배와 그에 따른 책임은
회사 운영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라는 것 역시 인지하고 있다.
R&R(Role and Responsibilites)을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이 개념엔 방향은 있을지언정 정답은 없다. 기업의 스타일과 구성원 개개인의 성향,
주요 코어 사업의 아이템 등등 그 형태에 따라 잘 조율을 해줘야 하는, 굉장히 까다로운 부분임을
알기에 나는 우리 모두의 구성원들과 똑같은, 비디오그래퍼(Videographer)가 되어 팀원들과 함께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기로 했다.
우리 회사에는 편집자가 없고 PD라는 직책도 없다. 우리들은 모두 비디오그래퍼(Videographer)라는
타이틀을 달고 매일을 지낸다.
아직은 생소한 단어다. 포토그래퍼는 알지만 비디오그래퍼는 사전에도 나와있지 않다. 그럴만도 한 것이
기준 혹은 정의가 굉장히 흐릿하다.
외국에서는 지금도 비디오그래퍼와 필름메이커(FilmMaker), 더 나아가
시네마토그래퍼(cinematographer)라는 타이틀의 차이와 구분에 대해 저마다의 기준으로 시끌시끌하다.
우리가 추구하는 스타일은 필름메이커(FilmMaker)에 가깝다. 창의력을 한껏 버무려 대상을 돋보이게 만드는
연출을 시도한대도 그 대상과 목적이 '기업'의 '제품' 혹은 '서비스'이기에 우리들의 기준은
'비디오그래퍼'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왜 편집자나 촬영 감독같은 특화된 직책이 아니라 구성원 모두를 기준마저 애매한,
비디오그래퍼로 칭하고 이를 조직 문화에 적용한 걸까?
콘텐츠 제작의 협업에 있어 공회전을 줄일 수 있는 가장 명확한 방법,
그것은 바로 '왜?'를 줄이는 데에 있다.
비디오그래퍼, 한글로 풀어내면 '영상제작자'라는 타이틀이 가장 근접한 대체어가 아닐까 싶다.
영상을 제작하는 데에 들어가는 요소는 정말 많지만 그 중에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을 지어보자면
'기획', '촬영', '편집'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주요 역할에 따라서 프로덕션도 '프리 프로덕션(Free Production) - 프로덕션(Production) - 포스트
프로덕션(Post Production)으로 나눠지니 말이다.
그렇기에 같은 주제를 다루더라도 진행하는 업무의 스타일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호흡이 착착 맞아 기획의 의도를 제대로 담아낸 뒤 편집을 통해 완벽한 마무리를 짓는 케이스는
생각보다 적다. 한 사람이 A부터 Z까지 진행을 해도 톤앤매너(Tone & Manner)를 유지하기가 까다로운데
기획과 촬영, 편집이 따로 노는 콘텐츠라면 오죽할까!
기획자가 기획'만', 촬영 감독이 촬영'만', 편집자가 편집'만'하게 되는 구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
이 대재앙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구성원 모두가 비디오그래퍼로서의 포지셔닝을 결정했다.
기획자가 영상 광고 콘티를 제작하기에 앞서 촬영현장과 기술에 대한 이해도를 가지고 있고 편집과정에 대한
이해도 갖추고 있다면 기획의 짜임새부터가 차이가 난다.
누군가가 유튜브에 이미 업로드한 결과물을 래퍼런스 삼아 '이런 분위기로 만들어 보자!'라고 시작점을 끊는 것과 '광고 송출 매체가 전광판이라고 하니 다양한 장면들을 짧게 짧게 담아내는 흐름으로 촬영을 진행하고,
전광판 특성상 영상 내부에 텍스트를 넣는 것 보다는 하단에 따로 크게 텍스트를 넣거나 아예 타이포그래피 형식으로 내용 전달을 하는 게 좋은 것 같은데 의견을 한번 나눠보자.'라고 하는 것은 누가 봐도
차이가 있지 않은가.
촬영자도 마찬가지다. 기획/편집에 대한 이해도가 갖춰지면 편집을 하기에 최적의 재료들(Footage)을
보다 면밀하게 확보해줄 수 있으며 이는 곧 편집에 들어가는 시간을 줄여준다. 쓰기 애매한 촬영물을
쓰기 위해서 '편집으로 심폐소생술을 하는 시간'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정말 굉장히
멘탈이 아픈 과정이다.
편집자 역시 기획/촬영에 대한 이해도의 여부가 콘텐츠의 톤앤매너를 좌우한다. 사실 제일 많은 부담을 안고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게 편집쪽이다 보니 책임의 화살을 많이 맞게 된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이해도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야 더 잘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기획 단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결과물은 다르게 나오는 경우가 빈번하고
제작과정의 제일 끝자락에서 고군분투하다보니 야근도 잦다. 대부분 영상업계에서 나오는 괴담은
이 과정에서 나온다. 이러한 괴담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면 기획과 촬영에서 기반을 잘 마련해주고
원활한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비디오그래퍼는 앞서 나온 이 모든 과정에 맞닿아 있다.
영상으로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표현해서 타인들에게 그 메시지를 납득을 시켜 본 사람은
모든 제작 분야에서 일을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라 할지라도 생각의 접근을
기획자, 촬영자를 포함한 총 제작자의 입장에서 접근한다.
결국엔 이해와 소통이다. 각자의 역할과 그에 따른 업무, 그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가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있어 갑작스런 솔루션에 능동적으로 가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원활한 협업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은 굉장한 장점이다. 업무의 시행착오와 공회전을 줄이는 것은 곧 제작 효율의 상승을 가져오기 때문에,
우리는 직책과 그 경계를 넘어 한 사람의 비디오그래퍼로서 호흡을 맞추기로 했다.
지금껏 풀어낸, 우리가 직접 하루하루 체험하고 있는 이 형태는 먼 훗날, 또 다른 폼(Form)으로
바뀔 지 모른다. 중요한 건 이 조직문화가 현재로선 최적의 워크플로우를 창출한다는 점이다.
사회과학이 매력적인 점은 그 변동성에 있다. 크리에이티브한 사람들이 대우 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정해요, 디스트릭트) 오늘도 우리는 한 사람의 비디오그래퍼로서 하루를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