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뒤로 갈 일은 없다

고단함 속 희망

by Reen


주말 오후 남편과 나, 딸 이렇게 셋이 외출하기로 했는데 무산됐다. 오전에 많이 못 잔 딸과 남편은 낮잠 자고 나만 집구석을 발발거리며 돌아다녔다. 틈새시간에 미뤄뒀던 딸아이 펀드 가입 좀 하려다가 모바일 뱅킹 비밀번호를 틀렸다.



딸 통장 계좌번호를 입력해야 했는데 적어둔 게 없었다. 놀랍게도 핸드폰에도 수기로 적어놓은 메모도 없었다. 통장을 찾는 수밖에. 샅샅이 한참을 뒤지다가 지칠 무렵 찾았다. 통장은 화장대 서랍 맨 위칸에 있었다. 이걸 못 찾고 버둥대다니. 허탈했다.






1시간쯤 지났을까. 딸과 남편이 일어났다. 함께 어딘가를 나갈 수도 있었지만 외출하고 싶던 마음이 꺾여있었다. 여전히 마음 한편은 나가고 싶어 머뭇거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딱히 오늘은 또 어디를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다녀와서 난 행복할까 생각했다.



이번 주말 내가 한 게 뭐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서일까. 그냥 불안했다. 나갔다 돌아오면 해는 질 거고 남은 건 내일을 마주하는 일뿐이겠지 싶었다. 돌아보면 이 습관적인 생각이 가져온 결과로 내겐 한 주가 시작되는 게 설렘보다 두려움이 컸다.






좀 억울하기도 했다. 나만 그럴까? 여유 없는 내 모습에 속상했다. 회사 일은 어떻게든 해치우지만 많은 일들을 등 떠밀리듯 처리하며 살아온 나. 시간 관리를 잘하고 싶은데 못한다. 무언가에 꽂히면 그 일이 해결될 때까지 시간을 쏟았다.



문제는 그 일이라는 게 대다수는 나에게 그다지 도움이 된다거나 생산적이진 않았다는 점이다. 대부분이 마치 오늘처럼, 기억나지 않지만 메모조차 해두지 않은 계좌번호 때문에 통장을 찾는 일과 같은 부류였다.






왜 써두지 못했을까. 기록하는 건 좋아하면서도 이런 메모는 소홀할 때가 많았다. 내가 주로 기록하는 건 내 감정, 생각이다. 어떤 현실적인 정보를 기록하는 일은 잘 못했다. 감정 배제하고 정보성 글을 쓰는 기자란 직업을 이런 내가 새삼 어떻게 해왔나 싶다.



매일 노트북으로 일하지만 나는 지극히 감성적이며 아날로그 인간이었다. 일할 때는 나름 치밀한 사람 같은데 있는 그대로의 날 보면 그리 철두철미하지도 꼼꼼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느긋하다. 대충대충, 그냥저냥 한 태도로 정리가 되는 기록은 미루기 일쑤.



통장 찾는데 흘러버린 시간이 유독 야속하고 스스로가 미련하게 느껴진 건 내가 엄마가 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제보다 나은 내가 돼서 일도 육아도 더 잘하고 싶은데, 여유를 만들어나가고 싶은데 발전은커녕 못난 모습을 마주하자니 괴로운 거다.






후회만 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이미 지나간 일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게 불변의 진리다. 시간은 앞으로 전진할 뿐이다. 해가 뒤로 갈 일은 없듯이.



매일같이 해는 칠흑 같은 새벽녘엔 자취를 감췄다가 어느새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존재를 거침없이 키운다. 정오 대낮 절정으로 빛을 발하다가 오후가 지나면 작아지는 모습이 반복되지만 해가 뒤로 가는 건 아니다. 날마다 이 루틴을 반복하는 해는 지치지 않는다.



매일 아등바등한 삶을 살고 있지만 순리대로 루틴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해가 고단한 나를 붙잡아준다. 뜨기 시작하는 해는 결코 뒤로 물러가지 않는다. 어제와 오늘이 별반 차이가 없다고 느껴져도 밝아지기 시작한 해를 막을 순 없다. 희망이 여기에 있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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