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에는 독일에서 2번째로 큰 유대인 커뮤니티가 있다.(약 7천 명 거주 중) WESTEND 지역에는 유대인 회당(The Westend Synagogue)이 있고 마인강 근처에는 과거 역사를 볼 수 있는 유대인 박물관도 있다. 또한 유대인 묘지도 존재하는 등 유대인들이 과거부터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했다.
왼쪽) 시나고그 오른쪽) 유대인 박물관 출처:frankfurt-tourismus.de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유대인의 삶은 평온치 못했다. 과거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했던 유대인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왜 핍박받으며 살았고 이들의 삶은 어땠을까?
유대인은 약 1150년부터 프랑크푸르트 대성당 근처의 Judengasse 지역에서 살았다. 당시 사회는 기독교 중심이었고 기독교인은 예수를 죽게 만든 유대인을 증오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1241년에는 기독교 세례를 거부한 유대인에 대해 분노를 표출했고 시나고그가 약탈당했으며 180여 명의 유대인이 살해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또한 14세기에 흑사병(Black Plague)이 유행할 때 흑사병 발생 원인을 유대인으로 지목하여 증오하기도 했다. (유대인의 위생 관리 습관 덕분에 상대적으로 병에 덜 걸렸는데 이를 본 기독교인은 유대인이 병을 퍼뜨렸다고 믿고 이들을 학살했다) 이후에도 독일 출신인 루터가 기존 가톨릭과 교황의 부패에 대해 비판을 하고 종교개혁을 추진할 때 유대인들은 종교개혁에 참여하지 않는다며 유대인을 죽이고 회당을 무너뜨려라는 선동을 하기도 했다. 종교적 차이로 유대인은 기독교 사회에서 아웃사이더였고 박해의 대상이었다.
흑사병을 일으킨 주범이라고 믿는 기독교 사회 속에서 화형을 당하는 유대인들. 출처 : 나무 위키
증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히틀러 때 더 잔인해졌다.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히틀러는 독일을 옛 로마제국처럼 강한 나라로 만들고 싶었고 게르만족의 우수성과 국민들을 통합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독일인은 유대인보다 우수한 민족이고 탐욕스러운 유대인 자본가 때문에 우리의 삶이 피폐해졌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유대인을 박해했다. 예전부터 유대인은 기독교인들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하고 주요 직업군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해서 기독교에서 엄격하게 금지하던 고리대금업에 종사했다. 중세시대 국왕의 돈줄 역할을 하기도 하고 지역 내에서 금융 사업을 하며 부를 축적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못했다. 1차 대전 이후 초인플레이션 시대에서도 자산가인 유대인은 독일 시민들보다 피해가 덜했었고 독일인들의 시기심은 증오심으로 바뀌어 히틀러의 선동에 박해를 정당화했다. 결국 1933~1945년 사이에 프랑크푸르트 유대인 11,915명이 나치에 의해 학살당했다.
나치가 유대인들을 구별하기 위해 만든 배지. 오른쪽 사진에 배지를 단 유대인의 모습. 철저하게 식별하고 박해했다.
2차 대전 종료 직후 1945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피난 등으로 떠났던 유대인 100여 명이 돌아왔고 1950년에는 시나고그를 재건하며 유대인 커뮤니티를 다시 부활시켰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소련이 체코를 침공하자 유대인들 일부가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했고 소련의 유대인 이주 허용 정책으로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하는 인구는 크게 늘어났다. 오늘날 약 7000명의 유대인이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하며 과거의 박해 없이 나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지금까지 유대인 핍박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다수의 사람들 또는 주류세력들의 잔혹성을 엿볼 수 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관습을 따르지 않으면 폭력을 행사하고 사회에 위기가 찾아올 때 소수를 탓하며 분노를 해소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국가에 위기가 찾아오거나 삶이 고통스러울 때, 소수에 대한 증오는 다시 찾아올 수 있다. 2015년 유럽 난민 문제로 시작된 외국인 이민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혐오 의식도 오늘날 저성장에 따른 실업문제와 빈익빈 부익부 문제가 결합되어 증폭된 결과다. 글로벌화에서 자국우선주의, 민족주의로 흐름이 바뀌고 있는데 위 상황에서는 소수에 대한 박해와 핍박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우린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고 남긴다. 유대인에게 행해졌던 비극의 역사도 잊지 말아야 한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1963년에서 1965년까지 나치의 악행을 심판하기 위해 아우슈비츠 재판을 진행했다. (아우슈비츠는 나치가 폴란드에서 만든 유대인 강제 수용소로 이 곳에서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 관련자들의 범죄를 드러내고 종신형 등을 선고하며 이를 심판했고 2017년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며 독일인들은 다시는 비극이 재발되지 않도록 기록하고 후대에 남겼다.
아우슈비츠 재판 녹음본. 세계기록유산. 출처:유네스코
프랑크푸르트 대성당 근처에 있는 Neuer Börneplatz Memoral Site에 방문하면 홀로코스트 때 학살된 사람들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는 벽이 존재한다. 혹은 ECB 건물 근처에 있는 Großmarkthalle Memoral Site에 방문해도 학살된 유대인을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
좌) Neuer Börneplatz Memoral Site 우) Großmarkthalle Memoral Site 출처:frankfurt-tourismus.de
이곳에 방문하게 된다면 유대인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차별받았던 소수인들의 고통을 기억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다. 아픈 역사를 잊지 말고 후대에도 교육해서 비극이 재발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나라 '위안부'도 소수인의 고통이고 절대 재발하지 않기 위해 기록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