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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플랜(MASTER PLAN)

한국힙합의 첫 무대

by Deadass

저번에도 언급했듯이 1990년대의 한국힙합은 PC통신의 하이텔, 나우누리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즉, 한국힙합은 가상에서만 존재했던 것이다. 만약 계속 한국힙합이 PC통신에서만 있었다면 한국이라는 땅에 한국힙합이 실질적으로 존재하고 문화가 되기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가상에 있던 한국힙합을 실제의 공간으로, 대중으로 끌고 나온 레이블이자 다이나믹 듀오 등 한국힙합의 역사를 이룬 래퍼들의 추억이 담긴 레이블의 이름은 바로 마스터플랜이다.


'힙합의 성지'-마스터 플랜 클럽

마스터 플랜은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 초반까지 왕성했던 레이블이었다. 그 시대에는 마스터 플랜이 힙합이었고 힙합이 마스터 플랜이었다고 한다. 이종현(별명: 돈마니)을 비롯하여 최한수, 김상규 씨 등의 공동 투자를 통하여 1997년 12월경 모던 록 계열 공연을 하던 푸른 굴 양식장을 인수하여 1998년에 마스터 플랜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마스터 플랜이라는 이름으로 바꾼 후 힙합 전문 클럽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리고 PC통신 하이텔의 흑인 음악 동호회 BLEX가 이 클럽에서 공연을 하며 자체 오디션을 보는 등 그 당시의 래퍼들이 이 마스터 플랜에서 활발히 공연을 했다. -Born Kim, 원썬, 주석, 데프콘, 스퀘어 등

또한 마스터 플랜에서 데뷔한 래퍼들도 있었다.- 한국힙합의 뿌리 깊은 나무인 가리온, 그리고 주석, 또한 다이나믹 듀오로 활동하고 있는 최자와 개코(그 당시에는 K.O.D.라는 팀으로 데뷔하였다), 에픽하이의 미쓰라도 K-Ryders라는 팀으로 마스터 플랜에서 데뷔하였다.

이렇게 데뷔와 공연을 정말 활발히 이어가던 마스터 플랜은 레이블화 과정에서 활동하고 있던 아티스트들이 떠나가게 되면서(오버그라운드 진출 등) 2001년 STILL-A-LIVE 공연을 마지막으로 클럽 마스터 플랜은 문을 닫게 되고 레이블 활동에 집중하게 된다.


마스터 플랜 레이블

클럽에 비해서 인원수는 적지만 당시에는 힘 있는 힙합 레이블로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마스터플랜은 언더그라운드와 오버그라운드 사이에 정확한 위치를 잡지 못했었다. 즉, 상업적인 홍보를 위해 라디오 방송에 집중하자 공연의 수는 줄게 된 것이다. 언더그라운드에서의 홍보 등의 상업적인 어려움으로 마스터 플랜은 위기를 겪게 된다.




마스터 플랜을 생각하며...

항상 다이나믹 듀오 등의 래퍼들이 마스터 플랜을 추억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마스터플랜이 정말 래퍼들과 팬들의 찬란했던 시절이었구나라는 간접적으로 느끼고 있다.

지금은 너무나 익숙한 모든 것들이 그때에는 처음이었겠구나. 힙합공연을 하는 것, 래퍼들이 데뷔하는 것, 앨범을 내는 것, 래퍼들이 관객에게 호응을 유도하는 것, 래퍼들과 팬들이 하나가 되는 순간들...

아마 한국힙합은 정말 많은 순간들이 다 처음이였고 오직 힙합에 대한 순수한 열정만 가득했던 마스터 플랜 시절에 다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마스터 플랜이 낭만적이고 감동적으로 느껴진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찬란했던 그 시절이지 않을까?

마스터 플랜에서 데뷔를 하여 힙합활동을 펼친 루키였던 당시 고등학생이였던 미쓰라, 갓 20살이였던 최자와 개코는 20년을 넘게 한국힙합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의 한국힙합의 대선배가 되었다. 이 상황을 보면 마스터 플랜의 시절이 참 많이 지나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마스터 플랜은 한국힙합의 첫 무대, 역사적인 사실로 자리 잡고 있다.

가장 낭만적인 , 정말 순수히 힙합에 대한 사랑과 열정만 가득했던 , 자유로운 팬들과 래퍼들의 교감들이 가득했던 마스터 플랜과 함께했던 시간과 래퍼, 팬들을 포함한 사람들이 여전히 기억되어야 하며 여전히 우리에게 한국힙합의 낭만과 추억을 선사해주고 있다.

이미지/자료 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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