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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선생 Mar 06. 2022

연기자의 삶

아이인지, 어른인지.

업무를 모두 마치고 잠시 여유를 갖던 금요일 오후. 6월의 활기찬 햇살이 들어서는 교실에서 신규교사인 나는 '내 직업이 뭘까'하는 생각에 잠긴 적이 많았다. 교직에 들어서고 보니, 나의 일을 그저 '교사'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함과 아쉬움이 있었던 모양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의 직업은 연기자의 삶과 거의 가깝다는 결론에 닿았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관계 속에서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고 한다. 그러나  교사는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그리고 더 화려한 가면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중극의 경극처럼 말이다. 내가 이러한 결론에 닿은 것은 교사가 되면서 많은 연기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나의 필모그래피를 떠올려본다.


1. 채소 잘 먹는 척

난이도: ★ 교육적 효과:?

"선생님은 채소 잘 먹어요?"

교사가 되면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받는다. 그중에서도 아이들은 '골고루'먹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 부모님의 '골고루 먹어야지'가 아이들의 마음에 자리 잡게 되고, 그것은 부모님 외의 어른인 나에게 질문으로 돌아온다. 나는 다행히 채소는 잘 먹는다. 샐러드를 좋아해서 3달 동안 샐러드만 먹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채소 사랑은 교육적 효과가 그다지 크지 않다. 왜냐하면 슬프게도 나는 160이 채 안 되는 작은 어른이기 때문이다.  "채소 많이 먹으면 키가 쑥쑥 커요~"라는 나의 말은 내가 생각해도 신뢰도가 떨어져도 한참 떨어진다.


2. 모든 과목을 잘하는 척

난이도: ★★★ 교육적 효과: ★★★

"선생님은 싫어하는 과목 없어요?"

이것도 자주 받는 질문이다. 특히나 고학년일수록 학업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기 때문에, 늘 이런 질문을 받는다. 사실, 초등 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수많은 이유 중에 하나도 내가 모든 과목에 관심이 있다는 이유도 있다. 하지만 관심은 관심일 뿐. 모든 과목을 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못하는 과목도 많다. 특히나 체육은 학창 시절부터 임용고시 때까지 날 괴롭힌 과목이다. 고등학교 때 그 누구나 받는다는 체육 '우수'를 못 받고 '보통'을 받아서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교육대학교 입시에는 음악, 미술, 체육도 들어가기 때문에 꽤나 절망적이었다. 고등학교 때 체육 선생님은 될 수 있으면 많은 학생들에게 '우수'를 주는 인자함을 갖고 계셨는데, 나는 그 인자함에서도 탈락할 정도로 체육 부진아였던 셈이다. 그래도 교사인 지금은 학생들과 자주 운동장을 나가서 함께 뛰논다. 아직 학생들과 함께 뛰놀 수 있는 체력과, 빠삭한 이론으로 체육 부진 선생님인 것은 들키지 않은 것 같다.


3. 벌레 안 무서운 척

난이도: ★★★★★ 교육적 효과: ★

"선생님 교실에 벌 들어왔어요"

나의 교직 생활에서 가장 큰 위기가 있다면 바로 교실에 왕 벌레가 들어오는 때이다. 나는 사실 벌레를 혐오한다. 내가 살던 집에서 돈벌레 한 마리가 나왔을 때는 며칠 밤을 벌레 악몽에 시달리고,  잠도 잘 못 잤다. 여름에는 벌레 한 마리라도 부딪칠까 봐 엄마 옆에 꼭 붙어 다닌다. 그래서 교실에서도 벌레가 들어오지 않도록 최선의 준비를 한다. 창문의 방충망이 뜯어진 곳은 미리 수리하고, 창틀의 빈 곳도 모두 막아놓는다. 그래도 벌레가 들어오는 날에는 모든 선생님이 그러하셨듯 '가만히 있으면 안 물어...'를 시전 해보지만, 역부족이다. 벌이 어디로 가는지 흘끔거리느라 내가 수업을 제대로 하지 못 할 때도 있었다. 결국 답답했던 우리 반 반장이 창문을 열어 벌을 내쫓았던 적도 있었다. 그날 반장을 몰래 남겨 나의 보물인 하리보 젤리를 나누어주었던 기억이 있다.


4. 굉장히 어른인 척

난이도 ★★★★ 교육적 효과:★★★★★

이십 대의 중반을 지나고 있는 이 나이에 아이들 앞에서는 침착하고, 멋진 어른인 척을 한다. 사실 아직은 경험이 많지 않아, 아이들처럼 똑같이 놀라기도 하고 무서운 순간도 있었다. 어떤 날은 우리 반 학생이 축구를 하다가 크게 미끄러졌는데, 머리 쪽으로 넘어져서 일어나지를 못하겠다고 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이가 크게 다친 건 아닌지 순간 너무 놀랐지만, 유일한 어른의 역할이 '놀라서 가만히 있기'가 아니었기에 바짝 정신을 차려야 했다. 아이를 진정시키고 보건 선생님과 협조하여 빠르게 조치를 취했다. 어머님께 최대한 침착하게 있는 그대로 전달해 드렸고, 다행히 아이는 별 이상 없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런 순간 외에도 늘 아이들을 교육할 때에는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한다. 이 공간의 유일한 어른, 교실에 있는 동안 아이들이 믿을 어른은 나밖에 없다는 것을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통해 매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교사는 매일매일 척을 해야 하는 척척 연기자의 삶을 산다. 신규 시절의 나는 본체가 학생이면서 교사의 가면을 쓰고 산다고 생각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교사를 하면서 늘 '어른'인 척 연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교육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 교수님께 이런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 강의에서 배운 내용은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교사는 누구보다도 연기자가 되어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덧셈과 뺄셈을 가르치려면, 덧셈과 뺄셈을 모르는 '아이'의 상황에 몰입하고, 덧셈과 뺄셈을 알아가는 과정을 연기해야 한다. 그래야 학생의 눈높이에서 적절한 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

 초등학교 학생들은 아주 기초적인 것들도 모르는 상태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교사는 늘 학생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진단을 해야 하고, 그 수준으로 함께 내려가서 지식을 알아가는 과정을 함께 체험해야 한다. 가끔은 덧셈과 뺄셈도 모르는 학생들이기에,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막막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백지상태의 학생에게 감정을 이입하면 어떻게 가르칠지 방향이 잡히기도 한다. 그래서 '아이'인 척 연기를 하며, 스스로 질문을 하며, 수업을 진행할 때도 있다.


아이유의 '팔레트'라는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스물 위, 서른 아래...애도 어른도 아닌 나이 때. 

어쩌면 아이인 척 하기도, 어른인 척 하기도 참 좋은 나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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